3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했더니 벌레가 물었나 봐.”
그녀는 얼른 단추를 잠가 목을 가리며 변명했다.
“그래?”
다행히 에밀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두드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죽겠다. 밤새 이곳저곳 다녔더니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쑤시네.”
“야간 교대하러 간 거 아니었어?”
에밀리는 빨래방 하녀로 보통 세탁실에서 근무했다. 낮에는 세탁물을 모으고 밤에는 본격적인 빨래를 하는데, 어제는 야간 근무였으니까 돌아다닐 일이 없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원래는 그랬지.”
“어디 심부름이라도 간 거야?”
에밀리는 크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밤새 후원에 있었어. 아니, 한밤중에 갑자기 소집 명령이 떨어지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갔더니 그날 야간 근무를 하는 사용인들이 죄다 거기 모여 있더라니까?”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빨래방 하녀만 불렀나 했더니 주방 하녀, 본성 청소 하녀, 마구간 담당 하인도 있고 시녀님들도 계시더라니까. 아마 별관의 유모님을 빼면 사용인들은 다 거기 있었을걸. 아무튼 시녀장님이 한동안 잔소리를 실컷 하더니 갑자기 후원의 잡초를 다 뽑아야 한다는 거야. 그 늦은 시간에!”
“그 밤중에?”
“그렇다니까! 열흘 후에 황궁에서 사람이 온다며 후원을 관리해야 한다는 거야. 근데 그걸 굳이 그때 하느냔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에밀리의 신발과 치맛자락은 온통 진흙과 풀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설마…….’
캐슬린은 제가 들었던 대화가 떠올라 오한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유모님의 시녀들도 거기 있었다니까. 주인님께서 유모님을 친어머니처럼 여기셔서 한시도 떠나지 말라고 붙여 준 사람들이잖아.”
“그래?”
“암튼 오밤중에 그 생고생을 하고 돌아오니까, 그 틈에 주인님께서 웬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셨다는 거야!”
에밀리는 몹시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그 여자가 도망치는 바람에, 주인님께서 노염을 내시며 얼른 찾아오라 성화셔서 집사님이 근방을 이 잡듯 뒤지고 있대.”
“그 여자를 각하, 아니 주인님께서 찾아오라 하셨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냥 꿈으로 여길 줄만 알았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그녀는 주방 소속이니 대전에 갈 일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라도 눈앞에서 마주치면 감히 들키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응. 근데 참 희한하지. 왜 침실에서 도망친 걸까?”
“유모님 눈치를 보는 거 아닐까?”
간신히 캐슬린은 흥미가 있는 척 덧붙였다. 다행히 에밀리는 수긍하는 듯했다.
“하긴 유모님이 가만있을 성정은 아니시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발텐 공작의 유모이자 공작의 친모를 어릴 적부터 모셨던 시녀인 그녀는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이 공작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공작저뿐 아니라 황궁마저도 뒤집어지고도 남았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하루라도 후계가 시급한 마당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주인님께서 고자이신 줄 알았어. 청혼은 하신 적도 없으시대고 귀족 영애들한테는 찬바람 쌩쌩 불게 대하시니.”
고자라니?
어젯밤 그녀가 만난 공작은 전혀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으면 모를까.
어쨌든 캐슬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밀리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마, 맞아. 그러니까 도망쳤을지도 몰라. 유모님도 유모님이지만 주인님께서 불장난 상대를 아내로 맞으실 리도 없잖아.”
“그러게. 그래도 누구인지 곧 밝혀질 거야.”
“……응?”
“집사님이 그 여자가 누구인지 밝혀낼 결정적인 증거를 갖고 계신대. 일을 치른 후 신 한 짝을 벗어 두고 도망갔다는데?”
“뭐?!”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린 입을 틀어막으며 황급히 구석을 쳐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벗어 놨던 그녀의 신은 한 짝밖에 없었다.
“켈리, 갑자기 너 왜 그래?”
에밀리가 미간을 좁히며 일어나 앉았다.
“그 얼굴 뭐야? 엄청 수상한데.”
“…….”
“너 설마.”
에밀리의 시선이 구석으로 향하더니 메뚜기처럼 튀어 올라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입이 떡 벌어진 그녀의 시선이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캐슬린은 차마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에밀리는 번개처럼 빠르게 그녀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야!”
“너, 뭐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아파!”
에밀리는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는 이번에는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젯밤에 주인님과 하룻밤을 보냈어? 침실엔 왜 갔어? 아니, 그분께서 이리로 오신 거야? 오셔서 널 데리고 가셨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제대로 말해 봐! 그래야 내가 널 도와주지. 응?”
아까까지는 피곤에 절어 물에 데친 채소처럼 누워 있던 에밀리는 호들갑을 떨며 난리였다. 하는 수 없이 캐슬린은 아까까지의 일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에밀리는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냥 꿈꾼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정말이야!”
“그래, 아무튼 그건 뭐 그렇다 치고 너랑 내가 죽는 악몽 때문에 거기까지 가다니, 간도 크다.”
에밀리는 그녀가 꿈과 현실을 혼동해 침실로 갔다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캐슬린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진짜 왜 도망쳤어? 주인님께서도 마음이 있으시니 그러신 거 아니야. 그냥 너라고 밝히고 신세나 한번 고쳐 보지.”
“그럴 일 없어.”
캐슬린은 정색하고 손사래를 쳤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 꿈이 뭔지.”
“알지! 월급 열심히 모아서 집 한 채 산 다음 나이 들면 이 성을 나가는 거. 근데 켈리, 공작 부인까진 아니어도 정부라도 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네가 돈 모아서 사는 집보다 주인님께서 내려 주시는 별장 한 채가 더 크고 좋을 텐데.”
“여태까지 내 말을 뭐로 들었어?”
안 그래도 밤새 겪은 일 때문에 몸이 찌뿌둥한데 에밀리가 자꾸 들러붙어 설득해 대니 기운이 빠졌다. 에밀리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생각해 봐. 황궁에서 이 사실을 알면…….”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머!”
문 너머에서 큰소리가 나는 바람에 캐슬린과 에밀리는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유모의 측근이자 발텐 공작저를 통솔하는 시녀장이었다. 캐슬린은 침대 밑에서 새 신을 꺼내 신으며 에밀리에게 이불을 개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하녀 나부랭이가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어?”
“죄송합니다. 어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이제야 막 쉬고 있던 터라서요. 헤헤.”
붙임성이 뛰어난 에밀리가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시녀장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하지만 시녀장의 이마에 팬 주름살은 더 깊어졌다.
“행동이 굼뜬 것으로도 모자라 귀도 어두운 거야?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어?”
“예? 무슨 소식이요?”
“하녀들은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앞뜰로 모이라는 유모님의 명이다. 당장 나오너라.”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발텐 공작저에서 머문 6년 동안, 유모님께서 지체 낮은 하녀들을 다 불러 모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녀장의 뒤를 따라가던 에밀리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나 절대 말 안 할게. 난 모르는 거야.”
“그래. 고마워.”
하지만 캐슬린의 머릿속에는 다른 걱정이 있었다.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저기 가서 서거라.”
유모가 지내는 별관 앞뜰에 도착하자 시녀장이 등을 떠밀었다. 이미 다른 하녀들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시녀장님, 이제 다 온 겁니까?”
“그렇다네.”
캐슬린은 에밀리와 함께 하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려다 온실 앞에 장검을 차고 선 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아…… 어젯밤 유모님과.’
호위 기사였구나.
캐슬린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눈을 내리깔며 하녀들 속에 섞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관 문이 덜컹 열렸다. 하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대리석을 밟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화가 많이 나셨나?’
발텐 공작에게 청혼서가 도착하면 유모가 분을 못 이겨 몇 번 발을 구르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 더 힘을 주어 밟는 듯하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성싶었다.
툭.
유모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던 찰나, 거무튀튀한 어떤 것이 땅에 떨어졌다. 무심결에 쳐다본 캐슬린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건 그녀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두고 나왔던 신발이었다.
“이 신의 주인이 누구냐?”
낮고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사내의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절대 유모님이 아니었다. 이건…….
“여기 있는 자들 중 하나임을 다 알고 왔으니 순순히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발텐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