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몸이 터질 듯 뜨거웠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기이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기분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갑자기 허리 아래에 절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 흘러넘치는 열기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욕구를 혼자 해결하는 건 신체 건강한 사내로서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끓듯이 뜨거웠다. 알렉시스는 어둠 속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찬 바람을 쐴 수 있다면. 아니, 사실은 그러기 전에 당장 허리춤을 풀고 이 달궈진 몸을 달랠 수 있다면.
해가 밝고 눈을 떠 밖으로 나간다면 알렉시스는 전장을 누구보다 거침없이 누비는 사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제 몸조차 혼자 가눌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이었다.
그가 홀로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호흡이 가빠질 무렵이었다. 혼곤해지는 정신 너머로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찬물이 입술 위로 흘렀다.
알렉시스는 받아 마시려 했지만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아 물을 죄다 흘리고 말았다. 좌절하려는 순간,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그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에 찬물이 흘러 들어왔다. 몸을 감싸고 있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정체를 숨긴 채 입술은 계속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알렉시스는 그것을 받아 마셨다.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혀가 움직였다. 그는 허겁지겁 물을 쫓다 그 속에 있는 혀를 만났다.
혀는 깜짝 놀라 도망가려는 듯하였으나 곧 알렉시스에게 붙잡혔다. 정체 모를 혀는 곧 그의 살덩이와 얽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한참을 씨름했다.
“하아…… 하.”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결이 흩어졌다. 어느새 혀가 얽히다 못해 입술이 깊게 눌렸다. 상대를 탐할수록 알렉시스의 몸은 안정을 되찾았다.
열병에라도 걸려 앓아누운 것처럼 꼼짝할 수 없던 처지에서 벗어나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졌다. 알렉시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맞지 못한 시야는 흐릿했으나 눈앞의 사람이 여자란 사실은 알아볼 수 있었다.
“너…….”
알렉시스는 잠시 입술을 떼고 누구냐 물으려다, 그녀의 목 뒤를 붙잡고 다시 끌어당겼다.
참을 수가 없었다.
맞대었던 입술의 달콤함에 안정되었다 생각한 몸이 또다시 끓어올랐다. 이 순간 자제력이라는 단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흐릿한 시야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이 어둡다 하여 감각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잡힌 손목을 빼내려 바르작거리던 여자가 힘이 달리는지 그의 가슴에 엎어졌다. 알렉시스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눕히고 몸 위에 올라탔다.
고요한 침실에 옷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알렉시스는 단번에 나신이 되었다. 제 허리 아래에 가둔 여자의 옷은 물에 젖어 있었다.
“가, 각하.”
“쉬.”
흐려진 정신임에도 여자를 달래는 손길은 다급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당장 이 여자를 안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해소하지 못한 열기가 심장을 태워 버릴 듯이 들끓었다.
말하지 않았으나 여자는 알렉시스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반항하지 않았다. 순순해진 그녀의 어깨가 드러나자 알렉시스는 입을 맞추었다.
“흐윽.”
그녀가 몸을 떨며 두려운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제 목에 두르고 귓가에 입을 맞추며 여자의 옷을 벗겨 냈다.
여자는 걸친 옷이 많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갈증을 달래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존재에 알렉시스는 미칠 듯 달아올랐다.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이리 가까이 와라.”
그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명령했다. 어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던 여자는 알렉시스의 목을 끌어안고 울먹였다. 그녀는 격랑 이는 바다에 떠도는 조각배처럼 휘말렸다. 그는 거친 제 움직임에 어색하게 따라오던 그녀를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여자는 울었다. 무엄하게도, 은혜를 입는 중에 훌쩍이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을 꽉 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울었다.
그것조차도 자극적이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눈물을 핥아 마셨다. 모두를 짓밟고 위에 올라서는 것이 용인된 신분답게 그는 마음껏 군림했다.
“각하……!”
땀이 밴 그의 등을 껴안으며, 여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흩어지는 목소리로 울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알렉시스는 몸에 고여 있던 열기를 터뜨려 기쁨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본능에 충실하던 그는, 제 행동을 나중엔 후회하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더욱 깊숙이 그녀를 껴안았다. 여자는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안고 가쁜 숨을 골랐다.
알렉시스는 한동안 그녀를 안고 느릿하게 여운을 즐겼다. 여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왜 말하지 않지?’
제가 누구인지. 이제 저를 어떻게 해 달라든지.
뭐라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순간 어질하며 눈앞이 어두워졌다.
‘젠장!’
아직 그 이상한 열기가 다 사라지지 않았다. 온몸이 마비되듯이 굳고 차가워졌다.
여자는 조심스레 품에서 벗어나더니 그를 자리에 눕혔다. 몸을 닦고 옷을 입혀 준 후 이불을 덮어 주고 손을 주물렀다.
가녀리지만 거친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와 손등, 손바닥을 힘주어 주무르는 움직임이 세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심하게도 심장을 죄는 기운이 시야를 흐리고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알렉시스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한참이 지나 그는 눈을 떴다. 새가 지저귀고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내리쬈다.
“각하, 기침하셨습니까? 오늘은, 아이고!”
“알스도프!”
벌컥 열린 문에 넘어질 뻔한 노집사 알스도프는 알렉시스가 뛰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각하, 어찌 이리 일찍 기침하셨습니까? 어제 파티에서 늦게 돌아오셨는데…….”
“아까 여기를 나서던 여자 못 보았나?”
“예?”
“못 보았냐 묻지 않느냐!”
알스도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자? 여자라니?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미리 여쭐 것을요. 한데 어느 가문의…….”
“내가 데려오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딱 잘라 말했다.
“밤 시중을 들라고 누군가 들여보낸 것이 틀림없어.”
“각하!”
알스도프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고 말았다.
“바, 밤 시중이라 하시면 혹시 찾으시는 분과……?”
“맞다.”
짧게 답하는 발텐 공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스물일곱 해 동안 여색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추잡한 의심까지 받던 주인이 이리 말할 정도라면 분명 이번에야말로 성의 안주인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즉시 문지기에게 확인해 보지요.”
알스도프는 수반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뛰듯이 달려나갔다. 알렉시스는 시녀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썰렁한 회랑을 둘러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간밤을 데운 열기가 거짓이었나 싶게 방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꿈이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가 느꼈던 기쁨은 꿈이라 하기엔 너무도 강렬했다. 살면서 그렇게 육체를 지배한 감각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 증거처럼 침대 시트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꽃잎처럼 남은 흔적은 그가 환각을 본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잠시 후 알스도프가 돌아와 보고했다.
“각하, 죄송합니다. 어젯밤은 물론이고 요 며칠 새 성안으로 들어온 외부인은 없었다 합니다. 당장 시녀 모두를 호출하여 조사하겠습니다.”
“찾는 즉시 내 앞에 데려와.”
“예!”
알스도프는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뛰어나갔다.
알렉시스는 다시 시트에 점점이 남은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도망을 쳐?’
알렉시스는 모르는 척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 성의 주인이었으며,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소유할 의무와 자격이 있었다. 하물며 그와 하룻밤을 보냈으면 더더욱.
한데 보란 듯이 도망치다니. 더구나 그 여자는 처음부터 제게 입을 맞추지 않았는가.
격렬했던 몸짓에도 여자는 서툴 망정 거부의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저를 한껏 껴안으며 이따금 입술을 열어 숨결을 나눠 주기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감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제가 누구인지 뻔히 알았을 텐데, 주저하지도 않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작정했다는 소리다.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 성에 넘쳐나는 것이 여자라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후회하게 해 주지.”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온 성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내리라 다짐하면서.
* * *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캐슬린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룸메이트인 에밀리는 야간 교대를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깔린 요에 누웠다.
그저 공작을 돕고자 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하게 실수를 했다. 아직도 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허리가 쑤시고 허벅지도 아팠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난생처음 겪는 통증에 불편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추워.’
열린 창 너머로 찬 바람이 들어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늦가을이라 그런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다. 캐슬린은 몸을 일으켜 문을 닫다가 새벽빛이 밝아 오는 밖을 응시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두 손 가득 흰 눈을 쥐었는데,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날짜와 시간은 믿기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이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캐슬린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우니 어젯밤에 겪은 일에 몸이 이제야 불편해져 왔다. 그 불편한 고통이 다시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녀는 일지를 다시 꺼내어 살펴보다가 지금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까지 올라온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목욕할 시간은 없을 것 같으니 옷이라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켈리, 일어났어?”
“에밀리?”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깨닫는 순간 울컥해져서, 캐슬린은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에밀리…….”
“웬일이야? 아직 동도 안 텄는데 벌써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흑, 에밀리!”
“어머, 얘가 왜 이래?”
캐슬린은 친구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스러워하던 에밀리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진정해.”
“보고 싶었어…….”
“무슨 꿈을 꿨는데 이래? 겁 없는 네가 이럴 정도면 악몽도 보통 악몽이 아니겠…….”
웃으며 핀잔을 주던 에밀리의 말이 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품에 파고드는 캐슬린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 냈다.
“너, 이거 뭐야?”
“응?”
“목에 이거 뭐냐고?”
거울에 비추어 확인하자 단추를 풀어 드러난 하얀 목에 정체 모를 붉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캐슬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