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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화 (1/110)
  • 1화

    “발텐 공작 부인은 오늘도 늦게 오시나 봐요?”

    캐슬린은 티파티가 열리는 정원으로 들어서려던 찰나에 멈춰 섰다.

    “귀하신 분이니까요. 어쩜 오늘도 안 오실 수도 있겠네요.”

    “귀하기는요. 그녀가 어떤 출신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그래도 부군이 황족이니까 저희와는 다르다 생각하는 거겠죠.”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분명한 어느 귀부인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캐슬린은 느리게 뒤를 돌아 중앙 정원에 설치된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늦지 않았다.

    “부인, 들어가시겠습니까?”

    멈춰 서서 망설이는 캐슬린을 향해 영문을 모르는 집사가 물어 왔다.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붉게 칠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남편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이번 파티만큼은 꼭 참석해야 했다. 그래야 하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으로 지위를 얻었는데, 얼굴이 웬만큼 두껍지 않고서야 이런 자리에 나타나겠어요?”

    은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부드럽게 자르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힐난하는 귀부인들의 목소리에 캐슬린의 심장도 잘려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후들거리는 걸음을 떼었다.

    “어머나! 발텐 공작 부인.”

    “오, 오셨어요?”

    모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는 허둥지둥댔다. 흰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꼭 움켜쥔 캐슬린은 그녀들이 자리를 만들려고 급하게 일어서는 것을 내려다보며 겨우 말했다.

    “모처럼 보내 주신 초대장인데, 안타깝게도 급한 일이 생겨 담소를 나누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쉽네요.”

    “아, 그러세요? 귀댁에 일이 생기셨나요?”

    “……네. 조만간 사과의 뜻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어차피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캐슬린은 빠르게 뒤돌아섰다.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예의상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정말 참석하는 건가 하고 놀랐지 뭐예요.”

    아직 제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이어지는 험담에 그녀는 결국 타고 왔던 마차에 그대로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지.”

    “예, 마님.”

    오늘도 사교계에 적응하지 못한 마님을 보필해야 하는 마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캐슬린은 마차 창문도 닫아 버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캐슬린 발텐.

    결혼 전의 이름은 켈리.

    신분을 속이고 공작저의 하녀로 일했던 교활한 여자.

    그런 그녀가 황실의 피를 이은 발텐 공작과 결혼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며 모두가 떠들어 댔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난생처음으로 주어진 귀한 기회를 놓칠까 얼마나 두려웠던가.

    사실은 저를 좀먹는 독약 같은 제안이었던 것도 모르고.

    “마님, 댁으로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캐슬린은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해는 져 있었다.

    “마님,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에밀리가 급하게 달려와 숄을 건네받으며 소곤거렸다.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디 계시니?”

    “침실에요. 마님, 그런데…….”

    “알았어.”

    에밀리는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캐슬린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외출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로 침실로 들어섰다.

    “공작님.”

    의자에 앉아 있던 장신의 남자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옷을 확인하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캐슬린은 멀거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어딜 다녀왔지? 그렇게 입고서.”

    공작 부인의 위세에 맞지 않은 옷차림을 했다 비웃는 걸까.

    졸아든 심장이 결심을 흔들었다. 그러나 캐슬린은 대답 대신, 몇 번이고 연습했던 그 말을 기어코 밖으로 꺼내 놓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뭐지?”

    “떠나고 싶어요.”

    캐슬린은 조용히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상했다.

    “웃기는 소리.”

    싸늘한 눈동자가 단칼에 거절을 고했다.

    “내가 왜 허락해야 하지?”

    “저는 허락을 구한 게 아니에요.”

    이별을 말하는 지금에서야 캐슬린은 깨달았다.

    그날 밤의 실수는 알렉시스 발텐이 아닌 캐슬린 윈스턴이 했다는 것을.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늘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황금색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왜?

    캐슬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 * *

    1년 전.

    반역을 꾀했다는 발텐 공작을 죽이고, 트리벨리언의 공작 위를 차지한 호프웰은 영웅이라 불렸다.

    그러나 발텐의 하녀들은 모두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는 막 들어온 열세 살짜리를 건드리셨대.”

    “세상에! 이번에도 어린애야?”

    “그렇다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새 주인님께서는 벌써 마흔이 넘으셨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다들 이 난리지! 세상에,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어? 대귀족답지 않게 온화하고 너그럽다는 사람이 제 딸뻘인 어린애만 총애하는 취향일 줄은.”

    하녀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빨리 돌았다. 그래서 캐슬린은 보통 홀로 일하는 편이었는데도 새 주인 이야기를 꽤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영웅이라니.’

    캐슬린은 하녀들이 수다 떠는 것을 듣다가, 새 마님의 방에 물을 올리러 갈 시각이 다 되어 몸을 일으켰다.

    어제 공작이 건드린 아이가 옆의 옆방에 사는 하녀라 더 마음이 좋지 않아 결국 들고 있던 주전자의 물이 출렁거려 반쯤 쏟아지고 말았다. 캐슬린은 어쩔 수 없이 우물가로 발길을 돌렸다.

    “하아, 춥다.”

    한겨울의 우물가는 고요했다. 캐슬린은 주전자를 내려놓고 두레박을 던지려 허리를 숙였다.

    “넌 누구냐?”

    “헉.”

    등 뒤에서 낮게 깔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슬린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두레박을 놓쳐 우물 안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 주인님.”

    뒤를 돌아보니 제국 유일의 공작에게만 허용되는 붉은 망토가 보였다.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왜 그리 놀라느냐?”

    호프웰 공작은 빙글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캐슬린은 혼비백산하며 무릎을 꿇고는 엎드렸다. 치마에 치덕치덕한 흙이 엉겨 붙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왜 혼자 물을 긷고 있느냐?”

    “그게.”

    “응? 말해 보아라.”

    호프웰 공작은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캐슬린의 턱선을 훑었다. 살갗을 지분거리는 흰 손가락에 소름이 끼쳤다. 캐슬린은 떨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마님께서 밤에 드실 물을 마련하고자…….”

    “오호라, 주방 하녀구나.”

    새 주인을 말려 줄 사람은 주변에 없는 걸까? 캐슬린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시녀장과 집사는커녕 지나가던 동료 하녀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닐 거야. 나는 스물한 살이잖아.’

    새 주인은 어린 하녀만 밝힌다고 했다. 지금까지 쉬쉬하며 퍼진 소문을 다 떠올려 봐도 열네 살 이상은 없었다.

    “난 원래 꽃망울이 트지 않은 어린 새싹에 동하는데. 너는 좀 다르구나.”

    새 주인의 손이 캐슬린의 옷깃을 훑으려 했다. 캐슬린은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찬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자꾸만 몸이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혀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뭐라고?”

    새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주인을 거역하는 것이냐?”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거부가 아니라면 당장 치마를 걷어라.”

    싫었다.

    아무리 사용인이 주인의 돈을 받고 일한다지만 캐슬린은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현자라는 새 공작이 으르렁거렸다. 캐슬린의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네 이년!”

    캐슬린이 꼼짝하지 않자 기어코 그가 노염을 냈다. 그는 허리에 찬 장검을 빼 들었다.

    “헉!”

    “감히 하녀 주제에 주인을 거부해? 나를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주인님, 아닙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무서웠다.

    전장에서 미친 듯 피를 뒤집어쓰고 날뛴다는 소문이 돌던 옛 주인, 발텐 공작은 거의 마주친 적도 없어서 두렵지 않았는데, 눈앞에 서 있는 너그럽고 온화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새 공작은 끔찍하리만치 두려웠다.

    캐슬린은 목에 와 닿은 시린 칼날을 내려다보며 벌벌 떨었다. 잘 벼려진 날이 여린 살결에 상처를 내어 쓰라렸다. 당장에 목이 잘릴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주인님!”

    그런데 누군가 달려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엎드렸다.

    “주인님, 제발 살려 주세요!”

    에밀리였다.

    밤새 교대 근무를 하고 와서 오늘은 휴무라며 좋아하던 룸메이트가 그녀 대신 공작의 발밑에 엎드려 빌고 있었다.

    “네년은 또 뭐냐?”

    “저는 이 아이의 친구입니다. 제발 이 아이의 발칙함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제발, 제발…….”

    “웃기지도 않는구나. 누구는 주인을 무시하고 누구는 주인을 가로막아?”

    휘익.

    눈 깜짝할 새였다. 노기 어린 남자의 음성과 함께 번쩍이는 장검이 하늘을 갈랐다.

    “아악! 안 돼!”

    뎅겅 잘린 목이 하얀 눈밭을 뒹굴었다. 뜨거운 액체가 캐슬린의 얼굴에 철퍽, 튀었다.

    “안 돼…… 안 돼!”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캐슬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에밀리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장검을 든 공작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어딜 가느냐?”

    스릉.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예리한 칼날이 번쩍였다. 캐슬린은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여기서 치마를 걷든지, 아니면 내 손에 죽든지 택하여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싫었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캐슬린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 우물로 달려갔다.

    “뭐 하는 것이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프웰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캐슬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우물 속에 몸을 던졌다.

    풍덩!

    우물물은 한기가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 것처럼 몹시 차가웠다. 거센 충격에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어두운 물속으로 점점 몸이 가라앉자 캐슬린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졌다.

    ‘헉!’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캐슬린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물가에서 몸을 던졌는데 눈을 떠 보니 방 안이었다. 캐슬린은 미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낡고 해졌지만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으며 밖에서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캐슬린은 급하게 방문을 열고 나와 보았다.

    ‘분명 어제 눈이 내려 이만큼 쌓였었는데.’

    저녁 바람도 이상하게 선선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복도에 누더기가 된 카펫이 깔린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눈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카펫은 젖은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고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어떻게 겨울이 갑자기 가을로 바뀌었을까? 내가 1년 가까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던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캐슬린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근무 일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지에 적힌 오늘 날짜는 9월이었다.

    캐슬린은 충격에 빠져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 성을 다 헤집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시간을 거슬렀다.

    죽기 전 시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신께서 저를 가엾게 여겨 다시 살려 주신 게 틀림없었다.

    캐슬린은 성의 뒷마당에서 감격에 겨워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죽음에서 회귀해 돌아왔다. 캐슬린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닦으며 에밀리를 찾아 나서려고 일어섰다.

    “흐윽!”

    그런데 코앞의 작은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주로 겨울에 창고로 쓰느라 비워 둔 곳이었다.

    “누군가 들을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사용인을 모두 물렸어.”

    밝은 달빛이 작은 창문 너머를 비추었다. 남녀가 서로를 안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몸을 기댄 문이 덜컹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이 뒷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녀도, 하인도, 집사도. 사람이라곤 오로지 캐슬린밖에 없었다.

    “흐으, 유모님……!”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유모님이라면.’

    옛 주인인 발텐 공작은 황제의 사생아로 어릴 적 친모를 잃었다. 황후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그를 길렀던 유모는 발텐 공작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고, 최근에는 남작 부인 작위까지 받은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지만, 주방 하녀에 불과한 처지가 굳이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캐슬린이 모르는 척 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각하께서는 어찌 되는 겁니까?”

    “지금쯤이면 이미 약효가 돌았을 거야. 아주 강력한 약이니 확실해.”

    “하지만 정말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어쩌지요?”

    “그분이 뒤를 봐주시기로 했어. 어차피 발텐 공작은 자식도 없고, 그 재산이 황실에 귀속되기 전에 챙겨야 해. 그래야 우리가 함께 살지. 안 그래?”

    유모는 소리를 높여 웃더니 만족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캐슬린은 하얀 눈밭에 점점이 떨어지던 붉은 피가 생각나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가 죽고 호프웰이 새 공작이 된다면 에밀리는 다시 죽게 될 것이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캐슬린은 돌아서서 옛 주인의 침실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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