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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9)화 (11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9화

    테오도르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초조해 보였다.

    “이야기를, 말입니까.”

    “그래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나는 슬쩍 뒷말을 삼켰다. 테오도르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잠시 생각했으나, 방해를 받지 않을 공간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럴싸한 곳이 집무실이었다.

    우리가 집무실로 가는 동안 그 누구도 테오도르에게 부딪히지 않았다.

    집무실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다음, 나는 의자 두 개를 마주 보도록 끌어다 놓았다.

    “앉아요.”

    테오도르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소매를 매만졌다가 이내 손을 거뒀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갑자기 연인이 되자고 불쑥 말할 수는 없었다.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빨리 말을 하지 않자 테오도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그는 내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얼어서 잘못을 만회하겠다고 할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괜히 분위기를 잡은 게 아닌가 반성했다.

    “카를라 님께 품은 마음을 허락하신 것처럼, 제게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어…….”

    “잠깐, 잠깐만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착각을 정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냥, 이제 우리 관계를 정확히 정의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나는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마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테오도르를 좋아하고, 테오도르도 나를 좋아하는데 우리 둘 사이를 뭐라고 남들에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돼서 부른 거예요.”

    내가 와다다 말을 쏟아내자 테오도르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동공이 확장되고 천천히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괜히 말했나? 너무 일렀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카를라 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답 말고요. 내가 먼저 말하면 테오도르는 절대 다른 말은 안 할 거잖아요. 뭐든 좋아요. 어떤 관계가 되고 싶어요?”

    테오도르는 잠시 침묵하더니,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카를라 님의 주변에 다른 사내가 오면 합법적으로 질투해도 되는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피곤하실 때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잡아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좋습니다.”

    말은 천천히 시작했으나 점점 속도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쌓아 둔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는 흡사 간식을 받은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하고 싶었던 말을 마구 늘어놓았다.

    그러다 그는 말을 멈추곤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예의를 차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은 우주처럼 푸르고 바다처럼 깊었다. 그 속에 빠져 한없이 헤엄치고 싶었다.

    “카를라 님의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고양감이 몸을 감쌌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몸이 붕 떠 그대로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 * *

    사용인들이 다시는 테오도르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공식적으로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알렸다.

    벨은 나와 테오도르가 서로 연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던 걸 모르는 척하느라 고생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소문 또한 빨라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신문 한쪽에 모 백작이 호위 기사와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덕분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호기심 가득한 편지를 몇 통이나 받아야 했다. 특히 이본은 신이 난 것을 감출 수 없는 필체로 편지를 보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꼭 말해 줘야 해요!’

    나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아야 했다.

    달라지지 않은 건 테오도르의 태도뿐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나를 호위하는 데 열중했다. 뜨거운 시선은 여전했으나 쉽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예의를 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기 전 그가 내게 입을 맞추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위대한 분이 카를라 님의 밤을 지켜 주시길.”

    처음에는 손등에서 시작해 지금은 이마, 눈썹, 콧잔등과 뺨까지 올라왔다. 당장 그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테오도르가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을 한동안 즐기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간질간질한 입맞춤을 받았다.

    “그리고, 제 꿈을 꾸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욕망이 스쳐 지나갔다가 아쉽게 사그라드는 것을 볼 때마다 나 역시도 아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문을 열지 않은 채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게 습관이 되었다. 벨이 오기도 전, 멀리서 들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눈을 뜨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경, 좋은 아침이에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이라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역시 기꺼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용인들은 기회가 생기면 슬쩍 자리를 피해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 특히 벨은 꾸준히 데이트를 종용했다.

    “마을 근처에 큰 호수가 있다는데 어떠세요? 노을이 질 때 보면 정말 아름답대요. 겨울이 되어도 얼지 않을 정도로 따뜻해서 낮에는 물장구를 쳐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일이 없거나 진전이 되지 않아 지루해질 때쯤 권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는 어디를 가서도 밥그릇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잠깐 가 볼까?”

    마침내 내가 그녀의 권유를 받아들이자마자 벨은 순식간에 준비를 마쳤다.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했던지, 내 준비가 끝나자마자 주방장이 바구니를 테오도르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간단하게 드실 주전부리예요. 과일도 잔뜩 넣었으니 모자라지는 않을 텐데, 혹시 모르니 좀 더 가져올까요?”

    “아니, 괜찮아.”

    테오도르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된 후, 처음 단둘이 나가는 것이다 보니 사용인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살짝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니 샌드위치며 머핀 따위의 간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둘이 먹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의 음식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듯 가뿐하게 바구니를 들었다.

    “모시겠습니다.”

    테오도르가 팔을 내밀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말을 몰기 적합한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말 한 마리를 함께 타야 했다. 테오도르가 이전에 한번 거절했던 크고 튼튼한 말이었다. 한 번에 올라타기 어려워하자 테오도르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말 위에 태워 주었다.

    평소라면 무릎을 꿇어 타는 것을 도와주었을 그가 갑자기 접촉해 온 탓에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가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이제 연인이니 이 정도의 접촉은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테오도르는 변명조차도 귀엽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투덜대는 대신 앞에 앉겠다고 우겼고, 테오도르는 위험하다며 몇 번을 말리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느긋하게 주변을 구경했다.

    벨은 호수가 마을 가까이에 있다고 했으나, 말을 타고 한 시간을 가야 나오는 거리라 절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거리를 온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수면이 은빛으로 잔잔하게 물결쳤다. 물이 맑아 가만히 바라보면 물고기가 살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을 넣어 보니 주변보다 조금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나뭇가지가 만들어 낸 그늘에 물고기가 숨어 있다가 사람 그림자가 드리우면 화들짝 놀라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호수 옆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호수 근처인데도 불구하고 나무가 많아 그런지 안쪽은 바람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름답네요.”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며 말하자, 테오도르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작게 웃는 소리에 눈만 들어 올려 바라보니 테오도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눈을 마주쳤다.

    “카를라 님이 더 아름다우십니다.”

    나는 홀린 듯 눈을 감았다. 테오도르의 입술이 내 입술에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뺨에 숨결이 스쳤다.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것이 밀려 들어왔다.

    “아…….”

    입술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테오도르의 몸이 굳었다. 순간, 그가 몸을 뒤로 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대로 몸을 밀어붙였다. 욕망에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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