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8화
수도에 있던 저택과는 달리 영지의 저택은 퍽 소란스러웠다. 손이 많아지니 이참에 할 일을 몰아서 하자는 생각이었던 듯, 대대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바쁘게 물건을 나르다가 내가 들어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백작님, 오셨어요?”
“얼른 점심 준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바람이 세서 일찍 들어온 거니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하게.”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젓고 집무실로 향했다. 벨은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벨은 내가 올 줄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밖이 소란스러워 내가 온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일찍 온 거야. 나머지는 내가 볼게. 특별히 이상한 건 없지?”
“네.”
어제 대충 훑어보고 남은 것들이라 마저 일을 끝낼 생각에 자리에 앉자 벨이 잽싸게 필요한 서류를 챙겨 주었다.
장부를 훑는 동안 테오도르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목이 아파 고개를 들면 그는 흐뭇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목이 언제 아팠냐는 듯 피로가 싹 가셨다.
‘이 맛에 연애하는구나.’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푸른 눈을 보자니 강을 보려 했던 내 행동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테오도르의 눈 안에 하늘도 있고 호수도 있는데 무엇 하러 멀리까지 나간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도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다행히 생각이 더 꼬리를 물기 전에 벨이 식사 시간을 알렸다.
“백작님, 식사 시간입니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요.”
“뭔데?”
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식당 청소가 늦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식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별것 아닌 일에 걱정하는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니. 식사야 어디서든 할 수 있는걸. 응접실로 갈까?”
“아, 응접실도 지금 청소 중이라서요!”
벨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발코니에 식탁을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 그럼 그리로 가자.”
저택 2층에는 툭 튀어나온 발코니가 있었다. 그저 깔끔하게 정리해 두기만 했을 뿐이라 식사하기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보기 전에 괜히 투덜거리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자리를 옮겼다.
한창 청소 중이라더니 복도는 한산했다. 벨은 긴장한 것처럼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있었다.
‘어라. 어제 봤을 때랑은 뭐가 좀 다른데?’
발코니의 반투명한 문 너머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벨이 문을 여는 순간 왜 그녀가 긴장했는지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코니는 레스토랑처럼 꾸며져 있었다. 발코니 중앙에는 흰 천을 깐 식탁이 놓여 있었고, 난간 위에는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모를 화분이 옹기종기 늘어져 있었다. 심지어 바닥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초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용인들은 레스토랑 직원처럼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나같이 맞춘 듯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심지어 집사는 팔에 흰 천을 걸치고 있어, 얼핏 보아서는 어느 레스토랑의 노련한 웨이터 같은 모양새였다.
‘세상에.’
발코니를 이렇게 꾸밀 시간이 있는데 식당이 엉망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사용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갑자기 대청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런 준비를 했을 사용인들이 귀엽기도 해 웃음을 터트리자 테오도르가 능청스럽게 의자를 뒤로 뺐다. 나는 웃음을 겨우 삼키고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거세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발코니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테오도르가 습관처럼 내 옆에 서자 집사가 반대편 의자를 빼 주었다.
“신사분 자리는 여기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레스토랑인 척을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 경, 그냥 맞춰 줘요. 재밌잖아요.”
테오도르는 묘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는 수프부터 나왔다. 주방장은 2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수프가 식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접시를 비울 때까지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례로 올라오는 식사 또한 나쁘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과 테오도르는 퍽 잘 어울렸다. 테오도르는 식사하다 말고 가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뺨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등으로 훔쳐보았으나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요, 이 풍경에 카를라 님이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테오도르가 나긋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렸을 터였으나 분위기가 포근한 탓인지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나 또한 사용인들 몰래 테오도르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는 모든 음식을 깔끔하게 먹기는 했으나, 특히 생선을 우아하게 먹을 줄 알았다, 포크로 생선 뼈를 살짝 들고 나이프로 살을 바르는 모습이 깔끔했다.
그는 검지로 잡은 포크의 손잡이를 가볍게 문지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손잡이가 무겁고 두꺼운 포크에만 그런 버릇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사소한 습관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함께 식사할 기회가 몇 없었던 터라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덕분에 송어구이의 맛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집사가 다가와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재미있었네. 이 저택 사람들은 유머 감각이 있군.”
“어제의 결례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니 그대도 신경 쓸 것 없어.”
집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 또한 그녀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용인들이 준비한 것이 거기까지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 * *
분위기가 묘했다. 사용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테오도르에게 자주 부딪혔고, 그가 지나갈 때마다 창문을 열어 대었다. 덕분에 그의 옷이며 머리가 흐트러져 야성적으로 보였다.
“테오도르 경, 괜찮아요?”
테오도르는 뒤에서 부딪힌 하녀 때문에 내 쪽으로 휘청거렸다가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주의하지.”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는 게 아닐까요.”
저택에 상주하는 사용인들뿐만 아니라 수도에서 데려온 사용인들도 덤벙대는 모습을 보여 의아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요.”
나는 다시 말을 타고 나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뒤를 돌아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자,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쏟아?”
“이건 괴롭힘 아닐까?”
“화내시면 어쩌지?”
“집사님이 위험한 짓은 하지 말랬는데.”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였다. 앳된 목소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수상해 잠시 발걸음 소리를 낮추고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근데, 젖은 남자 멋있잖아.”
“그건 그렇지.”
“기사님 성격도 좋아 보이던데, 나중에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확 끼얹는…….”
나는 불쑥 모퉁이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뭘 확 끼얹는데?”
“꺄악!”
거기에는 어린 하녀 세 명이 큼직한 양동이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덕분에 양동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바닥에 물을 튀겼다.
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양동이의 물을 테오도르에게 끼얹으려고 한 모양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려고 했지?”
하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테오도르가 물끄러미 양동이를 바라보았다가,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하녀들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야 할 거야.”
“백작님, 용서해 주세요. 나쁜 뜻은 없었어요.”
어린 하녀들은 오들오들 떨며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내가 당장에 매를 때릴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를 묻는 거란다. 똑바로 대답하렴.”
“그, 그게….”
그중 하나가 떨며 입을 열었다. 하녀의 말은 기가 막혔다. 그녀의 말인즉슨, 테오도르와 내가 서로 좋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진전이 없는 것 같아서 꾸민 짓이라고 했다. 테오도르가 물에 젖어 남성적인 면모를 보이면 내가 좋아하리라 생각했다는 말에는 화를 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과연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세계의 주민들이었다.
“가담한 사람은 너희가 전부니?”
그들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더듬더듬하는 말을 들어보니 사용인 대부분이 계획에 가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려온 사용인들 또한 여행으로 들떠 그들에게 휘말린 것 같았다. 내가 없는 사이 사용인들에게 무슨 말이 돌았을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귀엽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살짝 부딪히거나 창문을 열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장난과 물을 끼얹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추후 처벌이 돌아갈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하녀들은 내가 당장 그들을 매질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듯, 훌쩍훌쩍 울면서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사용인들이 이런 걸 꾸밀 정도로 우리가 진전이 없어 보였나?’
이제 정말 나와 테오도르의 관계를 정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테오도르 경,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