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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7)화 (117/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7화

방을 치운 후에도 꽃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는 낯선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테오도르에게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어.’

눈앞에 흰 캐노피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테오도르가 불쑥 내게 제 감정을 보여 줄 때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지. 아니, 엄청 좋았어.’

테오도르가 속삭였던 말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자, 심장이 쿵쿵 소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쉬이 잠들 수 없었다.

해가 침대 위로 비추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낯선 곳이라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피곤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단장을 도와주기 위해 들어온 벨은 푹 잤는지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저택이 작지만 잘 관리되어 있다며 즐겁게 재잘거렸다.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알이 굵은 목걸이를 걸었다. 단정한 분위기의 옷을 골라 새로 온 영주는 검소하지만 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로 했다.

“조금 무서워 보이는데, 뺨을 좀 더 붉게 할까요?”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아.”

거울 속의 나는 살이 붙어 이전처럼 처량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눈매가 매서워 입을 꾹 다물면 묵직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도와 다르게 바람이 불어도 그리 춥지 않아 코트만 걸치기로 했다. 많은 옷을 껴입은 영주는 그리 위엄 있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집사는 말을 여섯 마리나 준비해 두었다. 키울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워 말을 여럿 두지 못하는 수도와 달리 재력만 받쳐 준다면 말을 얼마든 키울 수 있다며 집사가 뿌듯하게 말했다.

“올가을에는 수도로 보낼 금액이 좀 모자라서 몇 마리는 팔아야 했지만, 제일 좋은 말은 남겨 두었습니다.”

영주가 마을에 정을 붙이게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주 들여다보고 신경을 써 달라는 뜻일 것이다. 죽은 백작이 얼마나 쥐어짰으면 그럴까 싶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순한 암말을 골랐다. 새카만 털은 잘 먹였는지 윤기가 줄줄 흘렀다. 가볍게 투레질하는 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머리를 기대고 애교를 부리는 게 보통 순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말 위에 올라타 집사에게 명령했다.

“집사, 테오도르 경에게도 말을 줘.”

“네, 백작님.”

집사는 덩치가 큰 말의 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테오도르도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큰 말 위에 올라타니 테오도르와 나의 덩치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훌쩍 말에서 내려갔다.

“집사님, 다른 말은 없습니까?”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집사는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는 사용인을 불러 다시 말을 데려오게 했다. 테오도르는 말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그중 두 번째로 작은 말을 골랐다. 그 말 또한 튼튼하고 덩치가 있었으나, 가장 처음 고른 말보다는 못하였다.

“기사님, 말이 너무 작지 않을까요?”

“영주님보다 더 눈에 띄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말은 외따로 보았을 때와 달리 테오도르가 타자 퍽 훌륭한 말처럼 보였다. 그의 풍채가 좋은 탓이었다. 그가 다시 내 옆에 서자, 집사가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 잘 어울리십니다.”

그녀는 그저 단순한 감상을 말했을 뿐이었겠지만, 그걸 들은 벨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몰아갔다.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리시죠!”

느슨해진 분위기에 맞춰 사용인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던졌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벨이 나와 테오도르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저택 사람들에게 언질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벨, 점심 전에는 돌아올 테니 장부를 확인해 두렴.”

나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고삐를 꽉 쥐었다. 말은 우아하게 저택을 박차고 나갔다.

마을은 한 번 정도 크게 세금을 거뒀다고 해서 휘청거릴 만큼 가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햇빛이 드는 곳마다 얇게 썬 과일을 꿰어 말리고 있었고, 풀어놓은 돼지와 양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있었다. 돌아다니는 개조차 비루먹은 티가 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지역의 사람들은 수더분한 데가 있었다. 옷은 깔끔했으나 새로 맞춘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죽은 백작이 세를 과하게 거두는 탓에 올해는 새 옷을 맞추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외지인이 신기한지 멀찍이서 구경하고, 어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가도 새로 온 영주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화들짝 놀라 예의를 차렸다.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나니 고쳐야 할 부분이 보였다. 크게 돈을 들여야 할 곳에 전혀 돈을 들이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길은 넓고 깨끗했으나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강을 곧바로 건널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빙 둘러 건너야 했다.

‘강의 상류 지점이라 물 때문에 농사가 망할 일이 없어 자주 다른 마을에 곡식을 내다 판다고 했지.’

마을에 마차를 가진 사람이 많은 것도 다른 마을과의 교류 때문이라고 했으니, 교통이 좋아지면 장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공사할 거면, 마을을 둘러싼 벽도 함께 수리하는 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죽은 백작이 영지의 규모에 비해 사병을 많이 부리는 탓에 공사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지만, 그들을 해고한다면 빠듯해도 여유 자금이 생길 것 같았다. 작은 마을이라 도둑이 들거나 강도가 들지 않아 다행이지만, 앞으로 길을 잘 닦으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쉬러 와서 왜 일할 생각을 하고 있지.’

나는 잠시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는 저 멀리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가에는 아직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서 마저 돌아보고 들어갈까요?”

뒤를 돌아 테오도르를 바라보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만히 말을 몰았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벌린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좋은 곳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손 볼 곳은 좀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곳이에요.”

“내년에도 함께 오고 싶습니다.”

“그럼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말 등에 앉아 멍하니 말을 뱉었다가 화들짝 놀라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중에는 테오도르 경이 지겹다고 할지도 몰라요.”

평소라면 가볍게 던진 농담에 아니라고 반색했을 테오도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몰아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렇게 될 때까지 곁에 두어 주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가 가볍게 휘청였을 뿐인데, 놀란 테오도르가 내 등에 손을 대고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어요.”

킥킥 웃자 테오도르가 농담을 던졌다.

“처음 카를라 님을 뵈었을 때 기억이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그때는 사고였어요.”

강렬했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와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가끔, 내가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세상에 나 혼자 떨어진 것 같은 막막한 기분. 모든 것이 아득하고 아찔해지는 기분이 순간순간 드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귓바퀴의 무게를 떠올렸다.

나는 왼손으로 귓바퀴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테오도르가 선물한 이어커프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단단히 고정한 탓에 쉽게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저절로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귓바퀴를 따라 휘어진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이제 이게 있잖아.’

그 전과는 달랐다.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았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테오도르를 한 번 바라보고는, 허리를 펴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강가로 다가갈수록 찬 바람이 매섭게 뺨을 스쳤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햇빛을 반사해 잔잔히 반짝이던 강물은 가까이서 보니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멀리서 보는 게 나았을 뻔했다.

“카를라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테오도르는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으로 바람을 막아 주었다. 단정한 머리카락이 멋대로 나부끼는데도 태연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바람이 강해지는데, 한번 들어갔다가 오후에 다시 나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바람이 잦아진 틈을 타 다시 말을 돌렸다. 아무리 수도보다 따뜻한 곳이라곤 해도 강바람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바람을 맞아 뺨이 얼얼했다. 테오도르는 왔을 때와 달리 앞장서서 바람을 흩어냈다.

‘섬세하다니까.’

사실 그는 섬세한 부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치도 없는 편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나를 위해 하는 사소한 배려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나를 계속 지켜보고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준다는 방증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기분이 좋아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테오도르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이유를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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