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6)화 (11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6화

    한적한 시골이었다. 마차 창밖으로 논이며 밭이 보였다. 수확 철이 막 지난 터라 아직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농사를 짓는 곳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은 마차 하나가 지나가기도 빠듯했고, 앙상한 가로수는 다듬은 지 오래되었는지 가지가 멋대로 뻗쳐 있었다.

    마부는 초조한 얼굴로 연신 마차 안을 힐끔거렸다. 그는 새로 온 영주가 얼마나 까탈스러울지 가늠하려는 듯 말을 던졌다.

    “그, 백작님, 불편하셔서 어쩌지요.”

    “불편할 게 뭐가 있겠나. 다 사람 사는 곳인걸.”

    웃으며 대답했으나 불안은 쉽게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택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저택은 낮은 언덕 위에 지어졌는데, 지대 자체가 높은 탓인지 오르막길에서도 한눈에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벨은 창밖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테오도르도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퍽 아름다웠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저무는 덕분에 지붕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마을 앞을 흐르는 큼직한 강의 물빛은 멀리서도 맑고 투명해 보였다.

    반면 저택의 정원은 누구의 취향이랄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꽃나무를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 놓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죽은 백작이 이 저택에 관심이 없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

    나는 정원에서 시선을 떼고 저택을 바라보았다. 집사와 사용인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당분간 잘 부탁하네.”

    집사는 노령의 여인으로, 지팡이를 짚기는 하였으나 자세가 꼿꼿하고 눈에는 총기가 돌았다. 나는 사용인들을 쭉 훑어보고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들은 백작님의 옷이니 방으로 가져가고, 목걸이와 팔찌, 머리핀은 따로 빼놓은 가방에 있어요. 아, 그 가방은 놔둬요. 제가 정리할 거예요.”

    벨은 능숙하게 사용인들에게 일을 분배했다. 저택에 있는 물건들을 사용할 생각으로 자질구레한 것은 부러 가져오지 않았지만, 사람이 여럿 움직이다 보니 아무래도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짐은 들고 오신 것이 전부입니까?”

    “그렇네만.”

    집사는 묘한 얼굴을 했으나 가타부타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게 저택을 간단히 소개해 주었다. 저택은 미리 들었던 대로 별장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수도에 있는 저택에 비한다면 절반도 되지 않을 크기라 아담한 느낌이 들었다.

    영지 경영을 위해 대리인 한 명이 오가는 것 외에는 집사, 주방장과 주방 하녀 둘, 세탁 담당 두 명만 상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간단히 식사만 하고, 내일은 영지를 둘러보려고 하네.”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장부는 지금 훑어보고 싶으니 집무실로 먼저 안내해 주게.”

    “네, 백작님.”

    집무실로 가는 내내 짐을 정리하는 사용인들이 테오도르를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호의 어린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수도에서 귀족들이 보였던 선망과는 전혀 다른 양상에 의아하기는 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하긴, 작은 곳이라 성기사를 볼 기회가 거의 없을 테니까.’

    작은 마을일수록 신앙이 독실하다더니, 성기사가 누구를 처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리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테오도르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뭐, 곧 그가 얼마나 순한 사람인지 다들 알게 될 테니 내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사용인들의 시선은 식사 중에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식탁에는 두 명의 식사가 놓여 있었는데, 테오도르가 평소처럼 사양하자 사용인들은 무슨 문제가 있냐며 기겁할 정도였다. 내가 기껏 준비해 준 것을 물릴 수는 없다는 핑계로 테오도르를 식탁에 앉히자 그제야 사용인들은 벌벌 떠는 것을 멈추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용인들이 테오도르에게 적응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나, 내가 생선을 좋아하게 될 일은 요원했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이라 생선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첫 식사부터 물고기 천지였다. 근처에 있는 큰 호수에서 잡아 싱싱한 고기라며 주방장이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기에 차마 사양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허브와 향신료를 듬뿍 써 잡내가 심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내 몫의 생선을 해치우고 있자, 테오도르가 장난스럽게 입가를 끌어올렸다가 내렸다.

    ‘사람이 편식 좀 할 수 있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저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양이 많아 절반을 다 비우지 못하고 식기를 놓아야 했다.

    “입맛에 안 맞으셔요?”

    조마조마하게 식사를 지켜보던 주방장이 물었다.

    “괜찮아. 맛있었어.”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생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요리 솜씨가 퍽 만족스러운 탓이었다. 수도보다 더운 곳이라 그런지 간이 짜고 매운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매번 이렇게 거창하게 차리면 피곤할 테니 내일부턴 평범하게 내오도록 해.”

    “아휴, 이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 매일 고기를 잡아서 상에 올릴까요?”

    주방장은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붙임성이 얼마나 좋은지 순식간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못 먹는 음식에 대해 알아낼 정도였다. 그녀는 손이 꽤 큰 편으로, 식사뿐만 아니라 후식도 듬뿍 내와야 성이 차는 모양이었다. 가운데가 움푹하게 파인 접시에 씨를 뺀 자두가 켜켜이 쌓였다.

    “피곤한 날엔 이게 최고예요.”

    테오도르가 자두 절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바닥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물을 연거푸 마셔도 입에 남은 단맛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빈 접시를 뒤로하고 도망가듯 방으로 향했다.

    “이제 쉬어야겠어. 내 방은 어디지?”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냉큼 앞섰다.

    “급하게 바꾸느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흡족하실 겁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내가 머무를 방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방은 내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는 여느 침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으나 침대 위에는 흰 캐노피 천이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엉성하게 장미꽃잎이 흩뿌려져 있었다. 심지어 향초가 켜져 있어 은은한 꽃냄새까지 났다.

    “이게…… 뭐지?”

    내가 멍하니 집사를 바라보자,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 더 두꺼운 커튼을 달까요?”

    “아니, 장미꽃을 왜 이렇게 늘어놨냐는 말일세. 이 초는 또 왜 여기 있고.”

    나는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집사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식으로 최대한 꾸며 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수도에서 이런 유행이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건 완전히 신혼 방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신이 혼미해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벨이 조심스럽게 집사에게 다가왔다.

    “생크림을 가지고 왔…….”

    그녀는 손에 큼지막한 볼을 가지고 있었는데, 볼 안에는 풍성하게 거품을 낸 생크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벨은 나와 테오도르, 그리고 집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집사님, 잠시, 잠시만요.”

    그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집사를 옆으로 끌고 가 소곤거렸다. 말이 길어질수록 집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백작님, 제 무례를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이 늙은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노인에게 괜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와 테오도르가 같은 방을 쓴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벨은 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치울까요?”

    “그래.”

    “기사님의 방도 곧 준비하겠습니다.”

    집사가 테오도르의 방을 준비하고, 벨이 하녀들을 불러 방을 치우는 동안 나와 테오도르는 응접실에 어색하게 앉았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흐트러트리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겨울에 장미꽃은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디서 구했을까요?”

    “얼핏 보기로는 들장미 같았습니다. 아마 강가 근처에 피는 장미를 말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바닥을 그렇게 유심히 본 건지, 그는 꽃잎이 말라 있었다는 것까지 지적했다. 나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유심히 보셨을 줄 몰랐는데요. 치우지 말고 테오도르 경을 거기서 재울 걸 그랬나 봐요.”

    테오도르가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상체를 내게 가까이 숙이며 활짝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야릇하게 보였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순간 몸이 굳었다. 대범한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농담입니다.”

    테오도르가 몸을 뒤로 젖혔다. 뭐라고 할 말을 찾기도 전에 벨이 돌아왔다. 나는 도망가듯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테오도르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