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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5)화 (115/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5화

    영지로 내려갈 준비는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미리 전보를 보내 저택을 단장하게 하고, 데려갈 사람을 추리고 가져갈 짐을 꾸리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거기에 내가 없을 때 처리할 일을 집사에게 인계하다 보니 일주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장거리 여행은 무척 낭만적이었다. 수도 외곽의 기차역은 신전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치형의 철골로 만들어진 천장은 신전보다 훨씬 높고 트여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승강장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모두 평상복이라는 것만 뺀다면 꼭 무도회장 같았다. 신문을 파는 소년은 그사이를 바느질하듯 누비며 외쳤다.

    “신문 사세요!”

    무슨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나 싶어 흥미를 보이자, 벨이 재빠르게 물었다.

    “백작님, 한 부 사 올까요?”

    “그럴래?”

    그녀는 솜씨 좋게 지나가는 소년을 불러 동전을 건네고 신문을 받아왔다. 신문은 질이 좋지 않은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간혹 잉크가 뭉쳐 있는 부분이 있어 글자를 읽기 힘들기도 했다.

    사실 신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가십지였다. 대부분이 광고였고, 그나마 재미있는 부분이라고는 어느 남작이 공개 구혼을 거절했다는 짧은 기사였다.

    [금빛 남작은 기사를 거절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어렴풋하게 원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은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았으나 어떻게 보아도 이본의 이야기였다. 기사 옆에는 작은 삽화도 그려져 있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린 귀족 여성과 무릎을 꿇고 장미를 내밀고 있는 기사의 그림이었다. 나는 피식 웃곤 신문을 접어 벨에게 넘겨주었다.

    저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철도의 끝에서 흰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파란 하늘로 흩어졌다. 동화책의 한 장면 같았다. 새카만 몸체를 가진 기차는 얼핏 투박해 보이기는 했으나 입을 다물 수 없는 박력이 있었다. 기차는 천천히 역으로 들어왔다. 주변 사람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며 나도 사용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작님, 다음 역에서 뵙겠습니다.”

    벨은 사용인들에게 이등석 티켓을 건네주었다. 그들도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같이 잔뜩 상기한 얼굴로,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짐을 챙겼다.

    기차에 탑승하는 순서는 일등석 손님부터였다. 내가 움직이자 벨과 테오도르가 뒤를 따랐다. 일등석 객실은 작은 방이나 다름없었다. 푹신한 소파와 화병이 올려진 테이블, 넓은 창과 단정히 매단 커튼까지. 순간 기차에 탄 것을 잊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늘 일반 좌석을 타고 다녔던 터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벨은 창가에, 테오도르는 문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내심 그가 내 옆에 앉기를 바랐으나, 같은 소파에 앉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기차는 아주 느리게 출발했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창 너머로 헐레벌떡 뛰어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하늘은 시릴 정도로 푸르렀고, 그 위로 증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흐트러졌다. 벨은 아침 일찍 부산을 떨더니 창밖을 구경하다 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벨,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이렴.”

    “네? 아니에요. 하나도 안 졸려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어 대었다. 그러나 무거운 눈꺼풀은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도착하면 한참 짐을 정리해야 할 테니 지금 좀 자 둬.”

    내가 다시 권하자 벨은 부끄러운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필요한 게 있으시면…….”

    “필요한 게 있으면 깨울 테니 쉬고 있으렴.”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눈을 감기는 머쓱했는지 눈치만 보고 있기에 먼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척했다. 한참 후 눈을 떠보니 벨은 벽에 머리를 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도 자고 있을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가 당황스러워하며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짓궂게 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는 사람 얼굴을 보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요.”

    그는 어찌할 줄 몰라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끔뻑였다. 한참 후에야 테오도르가 변명했다.

    “자세가 불편하실까 봐 그랬습니다. 불순한 의도는 절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 이토록 서투른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눈을 휘어 웃자 그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카를라 님의 잠든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벨을 깨울 수는 없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어땠나요?”

    “바로 눈을 뜨셔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잠들어 있었다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 버릇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침을 흘리거나 이를 갈았을까 봐 부끄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저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라 테오도르를 놀릴 생각에 잔뜩 신이 날 뿐이었다.

    “그래요? 아쉽네요. 이번엔 정말 잘 테니까 구경해도 좋아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 수는…….”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증기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농담이에요.”

    씩 웃자 테오도르가 마른세수했다. 너무 놀렸나 싶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거든요.”

    “카를라 님은 항상 아름다우십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말에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제가 보는 것이 싫으시다면, 일어나실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정말이라는 듯 바르게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문 쪽으로 향했다. 기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꿈쩍하지 않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예 안 보겠다고 말하니까 서운해지는데요?”

    변덕스러운 말에도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의 팔을 건드렸다. 검지 끝에 빳빳한 제복 천이 스쳤다.

    “그럼 대신 손을 잡아 줘요.”

    테오도르의 얼굴이 다시 내 쪽을 향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제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으나, 그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내 손가락을 덧그리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엄지손가락의 뿌리를 간지럽히던 손가락은 검지를, 세 번째 손가락과 가장 가느다란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손가락을 간지럽히던 손이 허공으로 들렸다.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그대로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아…….’

    테오도르가 옅게 미소 지었다.

    “위대하신 분이 카를라 님의 휴식을 지켜보시길.”

    소파에 다시 손이 닿을 때까지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보여 주는 이런 면모에는 아무리 해도 적응할 수가 없었다. 기차 기적 소리에 맞춰 심장이 멋대로 요동쳤다.

    “역에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카를라 님, 편히 주무십시오.”

    “고마워요.”

    시원스럽게 대답하기는 했으나 도무지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곁눈질로 본 벨의 눈가가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 * *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인 탓인지 쉽게 잠이 몰려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벨은 이미 짐을 챙기고 있었다.

    “백작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덕분에 잘 잤어.”

    그녀는 정차하기 전에 깨울 생각이었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테오도르의 손은 이미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손이 뜨거운 것을 보아 방금까지 계속 손을 잡아 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손으로 손등을 한번 쓸어보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백작님, 마부가 제시간에 잘 나와 있을까요?”

    벨이 무릎 위에 큼지막한 짐 가방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녀는 처음 가 보는 곳이라 걱정이 된다며 연신 종알거렸다.

    “그러게, 지나다니는 말을 잡아탈 수도 없고.”

    벨의 걱정에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동안 기차는 역에 완전히 정차했다. 우리는 탔던 순서와 반대로 기차에서 내렸다. 오랫동안 덜컹거리는 기차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땅에 발을 딛자 다리가 찌릿찌릿했다.

    기차역은 한산했다. 선로 건너편으로는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사용인들이 모두 내리자, 멀찍이 서 있던 마부가 황급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역 밖에 줄지어 늘어진 마차는 멀리서 보아도 준비를 단단히 한 티가 났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마중 온 마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영지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퍽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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