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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4)화 (11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4화

정말 아무 의도도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상자 겉면을 만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럼 잠시…….”

테오도르가 내게 상자를 건네고, 이어커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으나 눈을 내리깔고 그가 이어커프를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손가락 끝이 천천히 귓바퀴에 닿았다. 어깨가 굳자 손이 멈췄다가 이내 힘을 풀자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금속이 귓바퀴에 닿았다.

“아프면 말씀해 주십시오.”

손가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슬쩍 테오도르를 훔쳐보니 그는 세상에 다시 없을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이어커프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져 묵직한 느낌은 피할 수 없었으나 귀가 아프거나 거추장스럽지는 않았다.

“다 된 건가요?”

“네, 아프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반대쪽도 걸어 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테오도르의 손은 어정쩡하게 허공을 배회할 뿐이었다.

“테오도르 경?”

“카를라 님,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테오도르는 마른침을 삼키고 손을 마저 뻗었다.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사르륵 들렸다.

‘아, 이것 때문이구나.’

머리카락을 넘기는 게 뭐라고 저렇게 조심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만큼 나를 정중히 대한다는 방증처럼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어커프를 거는 데 익숙해졌는지 이번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양쪽 귀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때요, 어울리나요?”

테오도르는 눈을 마주치고도 잠시 멍해져 있다가,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쑥스러웠다.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긴장감이 우리 둘 사이에 가득 들어찼다. 마른침조차 삼킬 수 없는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의 눈에는 내가 한가득 담겨 있었고, 그 시선에서 쉽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테오도르의 입술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가 이내 사라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거울을 가져오겠습니다.”

몸을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내게서 멀어지려 하는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카를라 님?”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방금 우리 둘 사이에 아무런 것도 없었다는 듯. 불쑥 볼멘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저는, 우리가 입을 맞출 줄 알았어요.”

이 기분이 뭔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나 혼자 설레발을 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인지, 아니라면 속상함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입에서 멋대로 말이 터져 나왔다.

“제 착각이었나요?”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정말 내 착각이었나?’

귓가에 열이 몰려 이어커프가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 뭔가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느낀 것도 모두 착각이었을까. 좋아한다는 말로 사람을 실컷 흔들어 놓고서는, 막상 내가 기다리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심스러워졌다.

‘그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머리가 복잡했다. 입술을 꽉 깨물어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우리가 연애를, 서로가 서로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그게 연애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그게 전부 제 착각이었다면…….”

목소리가 이상하게 튀는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뒤틀린 레코드판을 틀어 놓은 기묘한 감각.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쥐고 있던 테오도르의 팔이 들리고, 얼굴 근처로 손가락이 다가왔다.

‘어?’

그의 손가락은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다가왔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에 가슴이 아렸다.

“저는 겁쟁이라 차마 입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거두었다. 목소리는 죄를 고하는 마냥 서글프고 처량했다.

“입을 맞추면 떨어질 수 없을, 아니, 분명 치를 떨 정도로 매달리게 될 겁니다. 카를라 님이 다른 사내에게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추악한 마음을 품게 되는데, 입을 맞추면 얼마나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될지…….”

나는 당황해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무슨……. 이게 무슨 말이야?’

누굴 좋아하는 게 큰 죄인가 착각할 정도로 절절한 태도였다. 숫제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카를라 님에게는 항상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내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무겁고 진중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스울 정도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난 정말 쉬운 사람인가 봐.’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테오도르 경.”

그의 이름을 부르고, 대꾸할 만한 틈조차 주지 않은 채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닿은 뺨은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그러곤 그대로 입을 맞췄다.

무작정 부딪힌 것치고는 입술이 다른 곳에 잘못 부딪혔다든가, 이와 이가 맞닿는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입술은 부드럽고 뜨거웠다.

그는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입술에 닿은 것이 누구의 체온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가 먼저 그를 놓아주었다.

“테오도르 경.”

“……네.”

“테오도르.”

“네, 카를라 님.”

내가 몇 번을 불러도 그는 대답을 되돌려 주었다.

“이제 날 더 좋아하게 되었나요?”

테오도르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물에 젖은 보석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네, 그렇습니다.”

애처로운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주면 질투할 건가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질투하지 않겠다는 확답 대신 노력하겠다는 그의 말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탓이었다.

귀여운 테오도르. 나를 좋아하는 테오도르. 입꼬리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이 세계에서는 미인에 속하지 않는 얼굴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테오도르. 첫눈에 반했다는 말 대신, 내가 했던 말이 상냥하다고 생각했다는 테오도르.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는 남자. 이상할 정도로 순진하고 올곧은 미남.

나는 그가 좋았다.

“내가 당신을 미워하게 될 것 같나요?”

눈꺼풀이 깜빡였다. 테오도르의 흰 뺨 위로 작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좋아해요.”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우리는 벨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오래, 아주 오래 그렇게 서 있었다.

* * *

벨은 입술이 부었다거나, 못 보던 귀걸이가 생겼다고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명백히 내 귀와 입술에 한 번씩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 때,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니?”

벨은 큰 각오를 했다는 듯 손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영지에 내려가실 때 함께 데려갈 사용인 리스트는 제가 작성해도 될까요?”

“그게 뭐라고. 좋……. 방금 뭐라고 했니?”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되물었다. 벨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집사님의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가 맡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요. 집사님과는 상의가 된 사항…….”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영지에 언제 내려간다고 말했던가?”

영지에 한번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언제 내려가겠다고 벨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가 황급하게 덧붙였다.

“작년은 내려가지 않으셨지만, 올해는 영주님이 바뀐 걸 알릴 겸 곧장 내려가실 줄 알았어요.”

“아, 그래?”

“아무래도 완전히 겨울이 오기 전에 이동하셔서요.”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벨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수도가 따뜻하기는 해도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겨울을 날 대비를 든든히 하기는 했으나,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학을 떼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겨울이 되면 따뜻한 지방으로 내려가니 카지노도 한동안은 한산할 것이고, 약속도 쉽게 잡히지 않을 터였다. 순식간에 마음을 굳혔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구나, 벨. 영지로 내려갈 준비를 하자.”

이번 겨울은 무조건 따뜻하게 보낸다. 마음이든 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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