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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3)화 (113/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3화

부채는 테오도르에게 줄 손수건에 맞춰 단순한 모양으로 주문했다. 늘 들고 다니는 필수품도 아니고 겨울이라 그저 장식용으로나 써야겠지만. 손수건과 부채 끄트머리에는 한글로 테오도르의 이름을 수놓기로 했다. 최대한 예쁘게 쓰기 위해 몇 번씩 종이를 바꿔야 했다.

이본은 진한 노란빛 천으로 된 손수건을 주문했다. 제임스는 짐짓 그것이 자신에게 줄 게 아닌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내기가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테오도르의 질투를 눈치채게 해 준 감사의 뜻을 담아 흔쾌히 입장권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이러면 백작님이 너무 손해가 아닐까요?”

“오늘 신세를 진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니 크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입장권을 선물하는 것 정도는 손해도 아니었다. 덕분에 테오도르의 귀여운 모습을 눈치챌 수도 있었으니 이 정도 호의는 베풀어 둬도 좋을 터였다. 테오도르는 헤어지기 전까지 내내 제임스를 경계했다. 정말 귀엽기 짝이 없었다.

테오도르에게 줄 선물은 기다린 지 며칠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훌륭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져 흡족했다.

나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받자마자 곧장 저택으로 돌아와 테오도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가장자리에 수놓아진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며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전에 부채와 함께 주문하신 물건으로 압니다.”

“네, 맞아요.”

샐쭉하게 웃자 테오도르가 입술을 벌렸다. 가벼운 감탄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런 반응은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얼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깊은 의미는 없어요.”

테오도르의 새파란 눈이 깜빡였다. 부담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가 무조건 좋아하리라 생각한 오만함이 창피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주 신세를 지면서도 변변찮은 선물 한번 준 적 없잖아요.”

그는 곧장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당황스러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너무 과한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제 가슴팍에 꽂았다.

“아닙니다. 무척 기쁩니다.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그 후로도 나와 테오도르 사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묘하게 그가 시선을 피하는 것만 뺀다면. 그는 어딘가에 정신을 빼놓고 온 사람처럼 굴었다.

“테오도르 경, 어떻게 생각해요?”

“네. 네?”

시선을 평면도에 주고 있던 테오도르가 황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경비 배치를 이렇게 바꿀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 예. 좋은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을 번복하자 테오도르는 엉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듣고 있는 게 아닌 티가 확연하게 났다. 넋이 나가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다른 곳에 신경이 온통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티가 나게 굴었는지 벨마저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성기사님이 요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그녀는 테오도르가 휴가를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 자신의 설명 부족이 아닌지를 의심했다. 나 또한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티를 내는 게 부담스러운가?’

테오도르의 의견도 묻지 않고 연인들끼리나 나눌 법한 선물을 한 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손수건을 건네주었을 때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사귀고 싶다고는 한 적이 없어!’

테오도르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우쭐거린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륜과 가벼운 사랑이 판치는 이상한 세계니 테오도르의 가치관 또한 가벼울지도 모른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으나 그의 마음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우리 관계는 무슨 관계냐고 정확히 묻고 싶은데, 무서워.’

지금껏 테오도르가 나를 좋아하니 내가 조금만 당기면 그가 넘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겁이 났다. 테오도르가 이 이상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지 않거나, 내가 애정 공세를 퍼부으면 질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어쩌지…….’

나는 당분간 말을 아끼기로 했다. 테오도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내가 선물 하나 했다고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건 또 뭐람.’

사람의 마음이 공식처럼 쉽게 딱딱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래서 연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와중 테오도르가 드물게 휴가를 신청했다. 처음엔 오전 시간만 휴가를 내겠다고 하는 걸 집사가 기겁하며 하루 종일 쉬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넉넉하게 사흘 정도 쉬다 와도 괜찮은데, 정말 하루만 신청하시는 건가요?”

요 며칠 멍하니 있는 이유를 떠볼까 하는 심산으로 물었으나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얼버무리는 모양새에 더 묻지 않고 휴가 신청서에 인장을 찍었다.

테오도르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묵직했다.

‘뒤를 따라가 봐?’

그가 뭘 하는지 궁금했다. 뒤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성이 나를 뜯어말렸다.

‘스토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나는 테오도르에게 바짝 쏠린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정신을 분산시키는 데 일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나는 사무실에 박혀 적힌 것도 얼마 없는 장부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덕분에 집사만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느라 사색이 되었다.

테오도르는 정오가 지난 직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일하는 도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벨이 테오도르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여전히 시선은 나를 빗겨 가 있었다.

“분명 오늘은 하루 통째로 쉬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가 복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어 말이 까칠하게 나갔다. 내가 꺼낸 장부들을 정리하고 있던 벨이 눈치를 볼 정도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벨이 조심스럽게 문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 보였다. 작게 손을 흔들어 나가 보라는 뜻을 전하고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말씀하세요.”

나는 테오도르의 가슴팍에 무언가 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께가 있는 것을 넣어 둔 듯, 조금 튀어나온 재킷은 척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뭐지?’

사직서는 아니겠지. 생각은 순식간에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나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테오도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큼, 카를라 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종이 위에 벨벳을 덧댄 모양이었다.

“이게 뭐죠?”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크기를 보아 큰 물건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액세서리처럼 작은 물건도 아닐 것 같았다.

혹시 반지가 아닐까 했으나 이내 생각을 지웠다.

‘반지를 이런 곳에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손가락 끝에 걸리는 종이를 만지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혹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향했다. 테오도르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상자 끝을 잡고 천천히 뚜껑을 들어 올렸다.

붉은 상자 안에는 아름답게 세공된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아니, 그건 귀걸이였으나 귀걸이가 아니었다.

‘이어커프?’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이어커프였다. 귀를 뚫지 않는 사람들이 귓바퀴를 장식하는 용도로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세계에서는 대부분 귀를 뚫어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금으로 된 넝쿨 줄기가 귓바퀴 모양으로 뻗어 있고, 옅은 색의 아콰마린이 꽃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좌우 한 쌍으로 이루어진 이어커프는 귀에 걸어 보지 않아도 근사한 물건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것을 보자 테오도르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은 귀걸이를 하기 힘들어하시니, 혹시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싶었습니다.”

굵은 손가락이 상자 끝을 연신 더듬었다.

“주신 것에 비해 초라하지만,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환희가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짜릿하게 차올랐다.

“이걸 언제 주문한 거예요?”

“백화점에 갔을 땝니다. 이본 남작님께 조언을 구해 주문했습니다.”

테오도르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나는 금방 그것이 언제인지 알아차렸다. 보석을 보러 가는 이본을 호위하겠다고 그가 따라 일어났을 그때였다.

“혹시 요 며칠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습니다.”

속내를 꺼내며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상자를 받지 않았다. 대신 좀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와 테오도르의 거리는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저는 이걸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니…….”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최대한 침착한 척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 경이 걸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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