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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2)화 (112/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2화

테오도르 주변의 시간만 정지한 듯, 그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만 아니었더라면 공간이 통째로 멈춘 게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 말은 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얼른 선수를 쳤다.

“질투했어요?”

테오도르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뻔뻔해 보일 정도로 잘만 호의를 비추더니, 내가 물으면 이렇게 삐걱거린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신나게 그를 놀렸다.

“질투했구나. 그래서 제임스 경을 그렇게 노려본 거예요?”

“경계한 것뿐입니다.”

내 말을 정정하면서도 그는 끝내 노려보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입가가 씰룩씰룩, 멋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경계했으면서 왜 나랑 제임스 경 둘만 놔두고 갔대.”

“그건…….”

놀리듯 말하자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건?”

“그건 제가…….”

쉽게 나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이본과 제임스가 돌아왔다. 테오도르는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다시 입술을 굳게 닫았다.

“다리는 괜찮나요?”

예의상 제임스에게 묻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고작 찻물인데요.”

제임스는 뜨겁지도 않았는데 걱정해 줘서 고맙다며 연신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니 이만큼 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마저 찻잔을 들었다.

* * *

이본은 부채와 손수건을 마저 봐야 한다며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상아를 깎아 만들었다는 부채를 보며 신기해하는 나와 달리 이본은 겨울에 무슨 상아냐며 혀를 찼다.

“겨울에는 상아보다는 비단이죠. 안 그래요?”

이본은 이국에서 건너왔다는 부채를 들어 보였다. 자개와 비단으로 꾸며진 화려한 물건이었다. 노란빛을 띠는 비단 위에 금가루로 만든 잉크로 글자를 그려 넣어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났다. 그뿐 아니라 가장자리 부분이 자개로 꾸며져 있어 여차하면 조잡하게 보일 법도 한 물건이 한결 우아해 보였다.

“그러게요. 상아보다 비단이 이본에게 더 잘 어울려요.”

“손수건도 비단으로 맞출까요?”

“무척 어울리실 겁니다.”

제임스가 눈치껏 이본을 추켜세웠다.

“이런 상품은 어떠세요?”

이본의 지갑이 활짝 열리자 직원이 슬그머니 물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여러 색과 모양의 부채가 담긴 상자를 열어 보였는데, 부채는 하나같이 같은 문양이 그려진 손수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에 맞춰서 출시된 제품이에요.”

“장미, 백합, 이런 건 너무 흔한데. 다른 무늬는 없나요?”

부채 모양은 꽃무늬가 많았는데, 하나같이 튀지 않는 색으로 자수를 놓은 것 위주였다. 꽃도 화려하게 여럿이 수놓아 진 게 아니라 가장자리에 두어 송이가 있는 게 전부였다. 백화점에서 파는 것치고는 너무 수수한 모양이라 의아하게 묻자 직원은 곧잘 대답했다.

“아무래도 겨울이 되면 생화를 모자에 꽂기 힘드니까, 그 대용으로 꽃무늬가 들어간 부채나 장갑을 많이 찾으시더라고요. 물론 다른 무늬도 맞춰 놓고 있답니다.”

직원은 모자에 꽃을 꽂고 다니던 유행이 액세서리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유명한 가수도 구매했다는 말에 이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수수한데요.”

“아, 이 부채는 아래의 손수건과 한 쌍이랍니다. 구매하시면 따로 포장해 드려요.”

직원의 말에 이본은 금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또한 흥미롭다는 듯 부채가 든 상자를 훑어보았다. 두 사람이 이해한 것을 나만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이본에게 물었다.

“손수건이랑 한 쌍이라서 그렇다니 이해가 안 가요.”

“손수건은 선물용이라는 뜻이에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자 이본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 같은 문양을 사서 나누는 거예요. 남자가 화려한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밝힐 수 없는 관계에서는 무난한 문양으로 맞추는 거고요.”

“아.”

이본이 설명해 주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부채와 손수건은 비밀 연애나 혹은 불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쩐지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하더라!’

백화점이라 구매자의 신분을 보호해 주는 것인 줄 알았더니, 그냥 말 그대로 밝힐 수 없는 이야기라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우스운 이야기기는 했으나 일종의 커플 아이템이라는 말에 솔깃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떠세요?”

테오도르에게 손수건을 하나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보여 주지는 못해도 그와 같은 문양의 물건을 하나씩 나눠 가지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좋을 게 분명했다. 나는 친절하게 묻는 직원에게 되물었다.

“꽃 말고, 글자를 넣어서 따로 주문할 수도 있나요?”

“그럼요! 견본을 보여 주시면 그대로 수놓아 드려요. 물론 원하시면 글씨체도 고르실 수 있고, 실도 고르실 수 있어요.”

“이본, 아무래도 전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다른 곳 먼저 둘러보고 올래요?”

“여기서 맞추려고요?”

이본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도 주문할래요. 다음에 같이 찾으러 와요.”

경쾌한 목소리에 제임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본의 짐을 내려놓을 곳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직원에게 주문서를 요청했다.

“그럼 손수건을 먼저 골라 보시겠어요? 부채는 아무래도 맞춰야 할 부분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려요. 손수건 먼저 고르시고 부채를 그에 맞추면 훨씬 고르기 편하실 거예요.”

손수건은 종류나 패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성이 쓰는 것이라 그런지 천은 단색이 많았고, 실의 색 또한 무난한 것들 위주였다.

‘무슨 색이 어울릴까.’

테오도르에게 준다고 생각하니 내 것을 고르는 것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테오도르가 입는 기사복이 희니 그에 맞춰 옅은 색을 고를까 하다가, 피부가 흰 편이라 짙은 색 손수건을 쓰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한참 고민하자 이본이 제임스를 불렀다.

“제임스 경, 손수건 고르는 것 좀 도와줄래요?”

그는 이본의 짐을 직원에게 맡겨 놓고는 냉큼 나와 이본의 사이에 섰다.

“물론이죠.”

내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의 시선이 날카로워졌지만, 제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팔을 걷고 여기에 올려놔 줘요.”

제임스는 소매를 걷고 팔을 내밀었다. 이본이 팔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했으나 그는 상품 위에 팔을 올릴 수는 없다며 극구 거절했다. 이본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수 없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천 조각을 팔뚝 위로 척척 늘어놓았다. 얼마나 능청스러웠는지 직원도 그녀를 말리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남자 피부에 직접 올려봐야 확인하기 쉬울 것 같아서요.”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으나,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를 부른 게 분명했다. 제임스는 테오도르와 피부색이 비슷해 샘플로 내어준 천을 대보기 좋아 보였다. 그는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천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내려놓으면 될 텐데, 안쓰러운 마음을 미뤄 두고 공을 들여 천을 골랐다. 내가 고른 것은 옅은 회색 천이었다. 직원은 회색이라고 했으나 은은한 광택이 돌아 얼핏 보기에는 은색처럼 보였다. 천은 흡수력이 좋고 부드러웠다. 여기에 은색 실로 수를 놓으면 퍽 그럴싸할 것 같았다.

“음, 제임스 경은 노란색이 정말 안 어울리네요.”

“그럴 리가요. 백화점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죠. 저처럼 노란색이 어울리는 남자는 드물 겁니다.”

이본은 제임스를 놀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이본의 말 한마디에 버드나무 흔들리듯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이본이 천을 고르는 동안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제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또 질투한다.’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나 싶을 정도로 그는 심하게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고개를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얼굴을 하는 게 귀여웠다.

“테오도르 경, 혹시 회색 좋아해요?”

가볍게 묻자 그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 생각해 봐요.”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 빙 둘러 말했으나 테오도르는 불평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내 멋대로 선물을 고르는 주제에 반쯤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했으나,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편인 게 나았다. 정말 싫어하는 것이라면 테오도르의 성격상 머뭇거렸을 게 분명했다. 그는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왜 물어보는지 궁금해요?”

“예, 그렇습니다.”

“안 가르쳐 줄래요.”

나는 어이없어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나중에 선물을 열어 볼 그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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