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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1)화 (111/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1화

    먼저 내기를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내가 받아들일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받아들이신다고요?”

    “그래요.”

    내가 흔쾌히 말하자 제임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자신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작님은…….”

    그는 잠시 말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고, 턱을 매만졌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독특하시군요.”

    어깨를 으쓱이자 제임스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내기의 내용은 단순했다. 제임스가 테오도르의 앞에서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을 때, 눈에 띄게 질투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다. 테오도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내기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걸어오는 도발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그가 내 행동에 입을 대는 게 싫기도 했고, 혹시나 테오도르가 질투하는 희귀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좋아요. 내기에는 보상이 있어야겠죠. 뭘 거시겠어요?”

    나는 제임스가 돈을 요구하리라 생각했다. 이본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 갚아 달라고 하거나. 그러나 제임스의 요청은 내 예상과는 영 다른 것이었다.

    “제가 이기면 카지노의 입장권을 선물해 주십시오.”

    “입장권을요?”

    그가 얼마나 돈을 받는지는 몰라도 사병의 월급은 카지노의 입장권을 사지 못할 정도로 박봉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이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빚을 졌나, 아니면 낭비벽이 심한 것일까. 호기심이 마구 튀어 올랐지만, 그의 사생활을 캐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것은 아니라 빠르게 궁금증을 털어냈다.

    “좋아요.”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손님의 사연을 굳이 캐묻지 않는 게 카지노의 철칙이라서요.”

    그런 철칙 따위는 없지만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제임스의 눈썹이 또 기묘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제임스 경이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차는 향이 좋기는 했지만, 너무 옅어 차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겨도 내가 부탁할 게 없긴 하네.’

    도전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내가 이겨 봤자 별 소득이 없는 내기였다. 빚을 진 남자에게 물질적인 것을 받아 낼 수도 없고, 사병에게 도움을 받을 일도 크게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이기면 경이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해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나는 무난한 것을 걸기로 했다. 나중에 가벼운 심부름이나 시켜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제임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 다시 차를 주문했다. 친하지 않아 할 말이 없으니 이내 우리 둘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테오도르가 언제 돌아올까 싶어 제임스의 어깨너머를 몇 번 힐끔거렸다. 내가 어디를 무엇 때문에 흘깃거리는지 알아챈 제임스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본 남작님께 들었을 때는 설마 했지만, 성기사님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처음 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내가 테오도르를 좋아하는 티를 냈나 싶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티가 많이 나나요?”

    “제가 눈치가 좀 좋습니다.”

    그는 킬킬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감기와 사랑은 숨기지 못한다지만, 때로는 말해 줘야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제임스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으나, 충고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제가 보기엔, 백작님께서는 성기사님을 너무 애태우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평가를 들을 정도로 티가 났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런 적 없어요.”

    “성기사님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백작님은 자꾸 밀어내기만 하시잖습니까.”

    “그런 적 없다니까요.”

    뻔뻔스럽게 말하자 그는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연애 상담을 하려고 경을 부른 거 아니에요.”

    나는 날카롭게 그에게 충고했다. 처음 봤을 때는 테오도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는 테오도르와 달리 경박하고 가벼운 남자였다.

    “저도 다른 사람의 연애에 제가 충고를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제임스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눈이 아래로 쳐졌다.

    “이본 남작님이 모처럼 불렀다 했더니, 다른 사람을 꼬드기라는 말을 들은 사람의 심정도 헤아려 주시죠. 부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게 두 분이 얼른 좋은 사이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본을 좋아해요?”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검지를 입술에 바짝 붙이고 쉿, 쉿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크십니다.”

    “세상에, 전혀 몰랐어요.”

    나는 그가 왜 카지노의 입장권을 선물해 달라고 했는지 곧장 이해했다. 이본은 카지노의 단골이었다. 이전보다 발길이 뜸하다고는 해도 방문할 때마다 판을 휩쓸어 화제의 중심이 되곤 했다.

    “이본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입장권을 선물해 달라고 한 거예요?”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한 거죠.”

    그는 이본에게 가벼운 빚을 진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의 경쟁자라며 투덜거렸다. 나는 제임스의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카만 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알고 있죠?”

    제임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죠.”

    이본에게는 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닐 텐데, 하고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는 남자를 측은하게 바라보자, 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래 봬도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본과 테오도르가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이본이 묻자 제임스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놀랍게도 몇 분 전부텁니다.”

    “제임스 경이 말씀을 정말 재미있게 하셔서요.”

    “아름다운 분 앞에선 아무리 무게 있는 사내라도 입이 가벼워지기 마련이죠.”

    이본은 깔깔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테오도르는 손에 든 상품들을 이본이 구매한 것들 위에 마저 올려놓곤 내게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카를라 님.”

    “어서 와요.”

    그는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하려나?’

    언제 테오도르를 도발할지 궁금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왼쪽 눈을 감았다 떴다. 이본은 그 표정을 보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보석 이야기를 꺼냈다.

    “토르말린이 눈에 밟혀서 다시 갔는데, 아까 못 보던 진주가 있는 거예요. 그것도 예뻐 보여서 어떤 장신구로 만들까 하다가 이렇게 늦었네요. 시간 가는 줄 몰랐다니까요.”

    “얼마나 예뻤길래요? 다음에 보여 줘요.”

    “물론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평소에는 3주면 충분할 일인데 성기사님이 주문을…….”

    이본이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주문을요?”

    “성기사님이 미리 받는 것보다 연말에 받으면 기분 좋을 거라고 하셔서, 좀 미뤄서 받기로 했다고요. 아마 연말 파티에서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과묵한 테오도르가 이본의 선택에 참견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시선이 쏠리자 테오도르가 헛기침했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그, 네, 그렇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입니다만…….”

    어물어물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가 그를 보며 설핏 웃자 제임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번에 구매한 보석은 연말까지 착용하실 물건입니까?”

    “그래요. 조그마한 것들을 좀 샀어요. 볼래요?”

    이본이 테이블 위로 자그마한 상자들을 꺼냈다.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어머.”

    이본은 늘어놓던 상자를 황급히 옆으로 쌓아 치웠다. 그러나 황급하게 치운 탓인지, 아슬아슬하게 쌓였던 상자가 와르르 쏟아지며 직원의 손등을 건드렸다. 앗, 하는 사이에 직원이 들고 있던 찻잔이 제임스의 허벅지 위로 쏟아졌다. 누구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윽!”

    “제임스 경, 괜찮으세요?”

    “죄,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임스는 사색이 된 직원을 달래며 허벅지 위에 떨어진 찻잔을 정돈했다. 그는 뜨거운 차를 허벅지에 뒤집어썼으면서 오히려 나와 이본을 걱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남작님, 백작님,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괜찮으니 얼른 씻으러 가요.”

    이본이 화들짝 놀라 제임스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그는 이본에게 잡혀 절뚝거리며 바지를 수습하러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어휴, 제임스 경이 많이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멍하니 말하자, 테오도르가 불쑥 말했다.

    “저 남자는 카를라 님이 걱정하실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그렇게 좋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그는 뜬금없는 소리를 뱉어 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수건으로 내 옷소매에 튄 찻물을 닦았다.

    “제임스 경은 이본 남작님의 친구예요. 방금도 매우 신사적이었잖아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카를라 님에게 추근거리면서도 내내 이본 남작님의 표정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두 여자를 손에 쥐고 저울질하는 놈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평소의 테오도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추근대니, 놈이니 하는 단어가 낯설었다. 아니, 하더라도 앞에 사과를 꼭 붙였을 그가 그런 말도 없이 와다다 말을 쏟아 내는 것이 신선했다.

    나는 테오도르에게 사실 제임스는 이본을 좋아하고, 그녀의 부탁 때문에 내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을 차마 밝힐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감히 드릴 말은 아닙니다만, 카를라 님. 저 남자는 안 됩니다.”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새파란 눈동자는 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저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요?”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닌데.”

    목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올라왔다. 아, 그의 질투가 달다 못해 혀가 아릴 정도였다. 제임스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가 해준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테오도르 경인데, 눈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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