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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0)화 (110/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10화

    이본은 정말 테오도르와 흡사한 기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어느 남작의 사병으로, 어쩌다가 이본에게 빚을 졌는지 모를 정도로 근사한 사람이었다. 까만 눈을 뺀다면 퍽 테오도르와 흡사한 외형을 가져 단연 미남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를 소개해 주며 이본은 퍽 뿌듯한 얼굴을 했다.

    “어때요, 멋지죠?”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고개는 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 멋진 분을 소개받게 되어 기뻐요.”

    “제임스입니다.”

    명목은 이본의 호위였으나, 그는 이본과 나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걸었다. 자주 눈이 마주치는 게 어색했다.

    테오도르가 질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쩐지 불안한데.’

    불길한 예감은 백화점을 들어가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낮의 백화점은 놀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가면무도회가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홀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장식도 많이 바뀌어 있었는데, 특히 가게마다 벽에 붙은 그림이 전부 바뀌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모피 코트와 장갑, 목도리 같은 것들을 한껏 두르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본은 남자들이 들어가도 멋쩍지 않을 정도의 가게들을 골라 소개했다. 이전에 들렀던 가게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인테리어며 상품이 싹 바뀌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장갑이 새로 들어왔네. 카를라, 이것 봐요. 양가죽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쩜 이렇게 부드럽지?”

    제임스 또한 나를 부추기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는 눈썰미가 퍽 좋았는데, 직원보다 더 예리하게 좋은 물건을 짚어냈다.

    “송아지 가죽이군요. 백작님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이본만큼이나 좋은 조언자였다. 특히 사치품에는 도가 튼 사람 같았다. 그는 기가 막히게 값비싼 물건들의 평가를 줄줄 늘어놓았는데, 왜 이본에게 빚을 졌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쇼핑하는 걸 좋아하니, 빚을 질 수밖에.’

    같은 흑발의 미남인데도 사치품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테오도르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나 나긋나긋하게 칭찬하는 목소리는 정갈하고 힘이 있어 테오도르와 썩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른 곳을 보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테오도르가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다. 푸른 눈의 성기사님은 내게 종종 칭찬처럼 들리는 감탄을 던지곤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아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나는 힐끔힐끔 테오도르를 보며 제임스에게 고맙다는 말을 던졌다. 테오도르는 넉살 좋은 기사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아 표정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테오도르가 질투하는지 아닌지 도통 아리송한 것만 뺀다면 쇼핑은 꽤 즐거웠다. 새로운 물건을 보는 건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우리는 장갑이나 목도리를 파는 가게부터 시가를 파는 곳까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제임스의 손에 구매한 것들이 주렁주렁 들렸다. 단골이 된 보석점에 들를 때쯤에는 다리가 아플 정도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백작님.”

    직원이 나와 제임스, 테오도르를 슬며시 번갈아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보석을 보여 주었다. 날이 추워지면 원석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내온 보석은 이전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알이 작았다. 연달아 내온 액세서리 또한 큼직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소박해 보이는 것들 위주였다.

    “겨울이라 점 내에서는 소박한 것들 위주로 갖춰 두고 있습니다만, 원하시면 주문도 가능합니다.”

    “일단 지금 있는 것들만 보여 줘요.”

    직원은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 수십 개를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이본은 여러 디자인을 훑어보며 연신 질문을 던졌다.

    “예쁘긴 한데, 너무 작지 않아요?”

    “그렇네요. 좀 더 큼지막한 것이 좋겠어요. 여기 있는 오팔도 예쁠 것 같아요.”

    “그렇네요. 루비랑 오팔로 하나씩 주문할까 봐.”

    나도 목걸이를 대보거나 팔찌를 껴 보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내가 귀걸이에는 시선도 주지 않자 제임스가 슬쩍 물었다.

    “백작님, 이런 것은 어떠십니까?”

    그가 권한 것은 자수정으로 포도 모양을 흉내 낸 귀여운 귀걸이였다. 이파리와 줄기는 금으로 되어 있었고, 포도알은 하나하나가 다른 자수정으로 만들어져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였다.

    ‘귀엽다.’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귀엽기는 했지만, 알레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아까웠다. 잠깐 끼워만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가도 얼마 전에 했던 귀걸이 때문에 아직 귓불이 부어 있는 탓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흥미롭게 귀걸이를 바라보자 제임스가 다시 한번 권했다.

    “포도는 풍요를 뜻하기도 하니 사업을 하시는 백작님께 알맞은 것 같기도 하고요.”

    “카를라 님은 귀걸이를 하지 못하십니다.”

    테오도르가 처음으로 제임스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서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눈을 흘기듯 제임스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깜짝 놀라 바라보자 순식간에 표정이 순하게 바뀌었다.

    “다친 여성에게 장신구를 권유하시다니 부주의하시군요.”

    나는 귓불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눈에 띌 정도로 부어 있지는 않아 의아해 제임스를 바라보자, 그 역시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벅였다. 그는 머쓱하게 테오도르를 칭찬했다.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호위로서 모시는 분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테오도르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답지 않은 행동에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귀엽긴.’

    나는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테오도르의 질투를 확실하게 끌어내기 위해 제임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심하게 부은 건 아니에요.”

    “상처가 나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상처는 아니고, 알레르기 때문이에요. 가끔 귀걸이를 하면 이렇게 되더라고요.”

    “이런,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러나 테오도르는 우리의 대화에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힐끔힐끔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본은 구경을 마쳤는지 흥미롭다는 듯 웃는 얼굴을 보자 부끄러워 얼른 말을 돌렸다.

    “한참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네요. 이본, 더 살 게 있나요?”

    “아뇨, 이제 다 봤어요.”

    이본은 직원에게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곤 내게 팔짱을 꼈다. 그녀는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아래층의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식당이라고는 하나 간단한 음료를 파는 곳으로, 큼직한 테이블을 늘어놓아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테오도르는 의자를 빼 주곤 습관처럼 등 뒤에 섰다. 이본에게 의자를 빼 준 뒤 그 옆에 앉은 제임스가 당황스럽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나는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테오도르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는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이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한참 동안 혹사한 다리를 쉬게 하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이본은 자신이 구매한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라, 아까 마지막에 본 보석이 자꾸 눈에 밟혀서 그런데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그녀는 마지막에 본 토르말린을 다시 봐야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더 쉬고 있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 그럼…….”

    내가 제임스를 힐끔 바라보자 이본이 손을 내저었다.

    “제임스 경은 쉬고 있어요. 아직 손수건이랑 구두, 부채가 남았거든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차 더 시킬 거면 내 것도 같이 주문해 줘요.”

    “혼자 갔다 오면 쓸쓸하잖아요.”

    우리가 실없는 실랑이를 하자 테오도르가 끼어들었다.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목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카를라 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먼저 이본을 걱정해 놓곤 테오도르에게는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제임스가 나서 주지 않으려나 해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본이 나를 보며 윙크했다. 둘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테오도르가 이본에게 쭈뼛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꽤 사이가 좋아 보였다. 누구에게나 밝고 쾌활한 이본이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나, 괜히 심통이 났다.

    ‘이거 질투인가?’

    테오도르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내가 말려든 기분이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못마땅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제임스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성기사님이 질투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빠르게 부정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손을 세워 입가에 가져갔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오늘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죽었을 겁니다.”

    “제임스 경이 착각하신 거겠죠.”

    나는 코웃음을 쳤다. 테오도르가 질투로 그를 노려보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테오도르는 제임스가 귀걸이를 권할 때 외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믿지 않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좋아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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