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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9)화 (10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9화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추려 말했다. 이본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짧게 말했는데도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마침내 얼마 전 신이 강림했던 이야기까지 끝내고 나자, 오랜 여행을 끝내고 온 듯한 피곤함이 몸을 감쌌다. 우울함에 잠식될 것 같아 차마 이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카를라가, 그러니까 당신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만 카를라고?”

    “맞아요.”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이본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왕처럼 단번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본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세상에, 신이시여,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본,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도 친구로 삼아 줄 수 있어요?”

    이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돼요.”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술이 있어야 했다며 농담을 던졌다.

    “그럼 계속 카를라라고 불러 주세요. 원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사실 내가 누구인지, 여기서 계속 카를라 행세를 해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카를라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내게 카를라는 카를라인걸요.”

    여기도 셰픽스피어가 있는 걸까, 어쩌면 햄릿도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웃을 수는 없었다. 잠시 우리는 말이 없었다. 온실은 바람 한 점 들지 않아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마침내 이본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볍게 생각해 봐요.”

    “가볍게요?”

    “당신은 죽지 않았고, 돈도 많고, 아, 백작이 죽어서 영지를 상속받았다면서요? 작위도 있으니 어디 가서 무시당할 일도 없잖아요.”

    이본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반박하려는데, 이본이 내 손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만약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난 최선을 다해서 즐길 거에요.”

    “즐겨요?”

    평소 이본의 말은 너무 빨라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쏟아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느린 속도로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래요. 즐길 거예요. 생각해 봐요. 카를라에겐 지금부터 실컷 즐겨도 될 정도의 돈이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은 수도에서 폐하 다음으로 자유로운 사람이고요. 하고 싶은 건 대부분 할 수 있어요. 돈도, 시간도, 지위도 있잖아요.”

    그녀는 무대 위의 마법사처럼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설명했다.

    “나라면 사고 싶었던 보석을 잔뜩 사고, 값비싼 외국의 물건을 실컷 구경할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연극을 보러 다닐 거고, 네 번은 백화점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눌러앉아 있을 거예요.”

    백화점이 개점하자마자 일주일에 일곱 번 방문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의 물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한참 동안 역설했다.

    “아무튼,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건 대부분 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우울할 거라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글렌다를 마시면서 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바뀔 수 없는 삶이라면 즐기는 게 나았다.

    “그러다 보면 마셨던 술을 내일 또 마시고 싶을 수도 있고, 백화점에서 봤던 진주 브로치가 사고 싶어서 다음 주를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나는 두서없는 이본의 말이 나를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려한 차림의 여자는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에 살아야 한다면 마음 붙일 곳을 찾아보라는 조언으로 들렸다.

    현실적이고 건실한 조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으나, 이본의 말대로 이곳을 좋아할 수 있게 노력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네요. 이본의 말이 맞아요.”

    이본은 눈을 깜빡이더니 방긋 웃었다.

    “그럼 이제 성기사님이랑은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죠?”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싸움 구경보다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이본은 심문의 귀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예리하게 우리의 관계를 파헤쳤다. 나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테오도르와의 일을 술술 떠벌렸다. 사실 누군가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성기사님에게 고백받았는데 한 번 찼다는 말이죠?”

    나도 테오도르를 좋아하고 테오도르도 나를 좋아하지만, 고백을 한 번 거절한 이후로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이본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신이 얽힌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우리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게 맞는지 몇 번이나 온실 너머를 곁눈질해야 했다.

    “타이밍이 완전히 꼬여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상황이란 거군요. 하지만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어요.”

    이본은 완전히 들떠서, 내게 마구 조언을 건넸다. 그녀의 말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충고라기보다는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와 하는 연애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먼저 고백할 수는 없죠. 패를 다 보여 주면 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우리는 카드 내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들뜬 이본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카를라도, 이본도 상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배신당한 과거가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질투 나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테오도르 경은 질투를 해도 표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표현하지는 않아도 조급해지기는 하겠죠. 다시 고백하게 만드는 거예요.”

    듣다 보니 그럴싸했다. 테오도르가 다시 고백을 해 준다면 그때는 냉큼 붙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질투 나게 하죠?”

    “내가 누군지 잊었어요?”

    이본이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귀여운 윙크였다.

    “나만 믿어요.”

    이본의 계획은 간단했다. 멋진 남자를 한 명 데려올 테니 같이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에스코트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자며 들뜬 그녀를 진정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신사분에게 실례가 아닐까요?”

    “괜찮아요. 빚을 차감해 주겠다고 하면 할 사람이야 차고 넘치니까요.”

    이본은 내게 어떤 남자가 좋으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질투만 나게 하면 될 텐데, 상대분의 외향은 크게 관계없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예요. 이왕 에스코트 받는 것, 잘생긴 남자한테 받으면 좋잖아요!”

    한 주에 한 번 미팅 약속을 잡던 새내기 때의 대학 친구가 떠올라 차마 그녀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건 하나만 말해 보라는 이본의 말에 홀랑 넘어갔다.

    “그럼 키는 저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테오도르 경보다 크면 올려다볼 때 목이 아플 것 같아요.”

    “키 큰 남자, 좋아요. 딱 봤을 때 위험해 보이는 남자는 어때요? 성기사님이 질투하기 쉽게요.”

    “음, 너무 험하게 생긴 사람은 제외하면 좋겠어요. 나도 눈매가 사납잖아요. 눈꼬리가 조금 처져 있으면 안심되지 않을까요?”

    “강아지 같은 남자 말이죠? 고양이를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의외네요.”

    “강아지는 귀엽잖아요. 그러고 보니 개를 한번 키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전에도 강아지를 키우려고 했는데, 엄마가 반대했었다. 가족들 모두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는데, 강아지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돌봐 줄 사람도 많으니 커다란 개를 키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테오도르와 커다란 개가 정원을 뛰어다니는 것을 상상하느라 이본이 대화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강아지를 키우려고 했는데, 어릴 때는 노랗던 개라도 크면 갈색으로 털 색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해서 포기했어요. 내 머리카락이 금발이면 좋을 텐데.”

    “붉은 머리카락도 근사한걸요.”

    “적발인 남자가 딱 한 명 있긴 해요. 피부가 창백하고, 눈 밑이 새카맣게 죽어 있긴 하지만.”

    “까만 머리카락이 좋겠어요.”

    이후로도 이본은 나를 살살 떠보며 구체적인 취향을 캐내었다.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한 취향을 말하고 나서야 그녀의 조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카를라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강아지처럼 눈이 순하고, 흑발에 청안인 기사님. 조건이 까다롭네요.”

    이본이 히죽거리며 온실 너머를 힐끔거렸다. 말을 하는 동안에는 미처 몰랐지만, 내가 말한 이상형은 테오도르의 외형과 흡사했다.

    “우, 우연이에요.”

    “그럼요. 우연이고 말고요.”

    내가 어설프게 부정하자 이본이 깔깔 웃었다. 그녀의 웃음 때문에 찻물이 가볍게 출렁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테오도르가 온실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이 보였다.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테오도르는 한참 동안 안을 기웃거렸다.

    멀리서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꼭 청안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했지만, 이본은 최대한 테오도르와 비슷한 외형의 기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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