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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8)화 (108/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8화

    나는 그녀의 말에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아까 다 봤거든요.”

    그러나 이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짓궂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한가득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성기사님에게 크래커를 먹여 주고 있었잖아요?”

    “이본!”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이본은 애교스럽게 웃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통 튀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차 한잔할까요?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보고 싶었어요.”

    “차를 마시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요.”

    “아직 샛별도 뜨지 않았는걸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그녀는 한참이나 나를 조르다가, 내가 넘어가지 않자 시무룩하게 팔을 놓아주었다.

    “알았어요. 그럼 티 파티에 초대할 테니 그건 꼭 와 줘야 해요?”

    “그럼요.”

    “그리고 그때는 꼭, 성기사님이랑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줘야 하고요.”

    부끄러워 입을 꾹 다물자,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본이 깔깔 웃었다. 마침 싸움이 끝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옮겼다. 이본과 눈으로 인사를 나누고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등골이 서늘했다.

    이미 마차와 함께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꺼냈다.

    “사람이 많아 피곤하셨나 봐요.”

    식은땀의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겠지만, 나는 짐짓 그런 척 고개를 끄덕였다. 벨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 *

    이본의 초대장은 단출했다. 미사여구나 안부를 묻는 줄글은 전혀 없었다. 시간과 장소만 덩그러니 쓰여 있는 초대장이었으나 외관만큼은 공을 들여 반짝거렸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이본의 장난스러운 말을 떠올렸다.

    ‘테오도르와 내가 연인처럼 보였나?’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멀리서 본 이본이 연애하냐고 물을 정도니,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사람들이 날 알아봤으면 어쩌지.’

    책상에 이마를 기대고 있자 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백작님,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나는 몸을 들어 올리고 그녀에게 초대장을 넘겨주었다.

    “티 파티에 갈 테니 일정을 비워 두렴.”

    “네.”

    벨은 내가 파티에 참석하거나 밖을 돌아다니면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예전의 카를라처럼 다시 방에 틀어박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성기사님과 파트너로 가시나요?”

    벨은 일부러 가볍게 물어보는 척했으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뭐지? 왜 이렇게 좋아하지?’

    성기사를 파트너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테오도르와 함께 이동했으니 달라진 건 없을 텐데, 벨은 신이 나서 기합을 넣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훑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 * *

    초대한 사람이 의자를 하나 더 준비해야 하는 것만 뺀다면 호위 기사가 파트너의 자격으로 방문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혼자 이본을 만나야 했다. 벨이 슬그머니 파트너가 있는 게 좋지 않겠냐고 운을 띄웠으나 나는 단호하게 테오도르를 호위 기사로 대동하겠다고 못 박았다.

    “카를라와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뻐요.”

    이본은 즐거운 듯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전처럼 노란빛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전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빛투성이는 아니었다.

    “온실을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예쁘죠?”

    푸른 온실 유리를 투과한 햇볕이 드레스를 초록빛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정원에 만들어진 유리 온실과 이본은 잘 어울렸다.

    “정말 예쁘게 만들었네요.”

    이본이 방긋 웃었다. 온실에 심어진 꽃들은 아직 꽃을 틔우지 못했으나, 꽃봉오리의 색만으로도 만개 후의 온실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은 쌀쌀했으나 온실 안쪽은 여름이라도 불러온 것처럼 후덥지근했다. 문에 가까이 서 있는 테오도르가 춥지 않을까 곁눈질하자, 이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사귄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그녀는 가십에 목마른 소녀처럼 자꾸만 질문을 던졌다.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역시 성기사님인가요? 아, 그렇죠. 성기사님의 고백을 깜빡 잊고 있었지 뭐예요.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설마 그때 넘어간 건가요? 어머, 어머, 그럼 두 사람은 죽은 백작이 이어 준 거나 다름없네요.”

    이본은 쉴 새 없이 떠들었는데, 누가 본다면 그녀가 금언 수행을 막 끝낸 사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사귀는 거 아니에요.”

    “왜요?”

    이본에게 우리 사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는 있지만 사귀지 않는 사이라는 걸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돌려 돌려 묻기로 했다.

    “이본, 이본은 내가 힘들어 보여서 돕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요.”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본 또한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잘못 본 거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잘못 보다뇨?”

    “만약, 그때 이본이 본 사람이 내가 아니라 아주 닮은 사람이었다면요?”

    이본은 미간을 좁히고 내 표정을 살폈다.

    “이상한 말을 하네요, 카를라.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럽다는 듯 손등을 토닥였다.

    “다른 사람과 카를라를 착각했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만약 그랬다면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더없이 다정했다.

    “그때 봤던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눈앞의 카를라가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나는 그때 봤던 그 사람보다, 내 눈앞의 당신이 더 소중하니까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하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본에게라면, 그녀에게라면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이본,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하녀들과 테오도르 경을 밖으로 보내고 우리만 대화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이본은 즉시 차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내보냈다.

    “테오도르 경, 이본 남작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겠어요?”

    그러나 테오도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서 있는 곳에서는 두 분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만일의 경우 카를라 님께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네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말할 수 없어 고민하자, 이본이 얼른 지원사격을 했다.

    “어머, 여자들끼리의 비밀 이야기라 남자가 주변에 있으면 들리지 않아도 부끄러워서 그래요.”

    “어떤 이야기를 하셔도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몰래 엿듣고 싶으시다면 계속 거기 계셔도 좋고요.”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테오도르의 순한 눈에 당황이 어렸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그의 말은 이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으나 본질은 내게 하는 변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왜 계속 여기에 있고 싶다는 건데요?”

    결국, 테오도르는 온실 밖으로 쫓겨나듯 나갔다. 그는 불안한 듯 몇 번이고 온실 안쪽을 힐끔거렸다. 이본은 솜씨 좋게 주변 사람을 무른 자신의 안목을 칭찬해 달라는 듯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단하네요.”

    나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본은 우아하게 손을 휘둘러 인사에 답하고는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주변 사람을 다 무른 거예요?”

    “사실, 이본에게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말이에요.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게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심호흡 한 번 하지 않고 말을 와다다 쏟아내었다.

    “백작을 죽였다고 자백하려고요? 그러지 말아요. 카를라, 이 수도에서 사람을 죽인 여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다섯은 넘어요. 치정 싸움 때문에 죽는 남자가 한둘도 아닌걸요. 물론, 어떻게 죽였는지는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얼떨결에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때 일을 물으면 정말 슬픈 일이었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거예요. 눈물이 안 나와도 다들 그러려니 할걸요.”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가 얼마나 나를 걱정해 주고 있는지 와닿았다. 내게는 남편을 어떻게 죽였는지 자세히 말해 줘 놓고는, 자신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점이 이본다웠다.

    “그런 일은 아니지만, 충고 고마워요. 다음에 누가 물으면 그렇게 할게요.”

    “그럼 무슨 일이에요?”

    이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이전의 카를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카를라를 아끼던 사람이 아니니 그녀의 상실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본이 나를 경멸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롯하게 나를 향한 감정이라는 어설프고 우스운 자기 위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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