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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7)화 (107/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7화

    누가 보더라도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테오도르를 시험하려고 하다니, 정말 못된 짓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알아봐 주면 좋겠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릴 핑계, 맹목적으로 그에게 빠져들 핑계가 필요한 것이다. 그가 나를 제대로 봐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었다. 늘어진 귀걸이가 묵직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홀에서 테오도르를 찾기는 쉬웠다.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한몫했으나, 그가 눈에 띄는 미남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복도 입구를 연신 힐끔거렸다. 나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이쪽을 봤다.’

    테오도르가 마침내 나를 찾았는지 손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나도 손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트너가 왔으니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깍듯한 말에 그에게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테오도르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 뒤로 주인에게 뛰어오는 커다란 개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즐거운 대화 중이신 것 같던데 제가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요. 가벼운 잡담 중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척 귓바퀴를 매만졌다.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렸다.

    ‘눈치 못 챘나?’

    미간을 살살 문지르고 있자 테오도르가 다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간식거리를 내놓았다던데, 가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간식거리라고는 해도 간단한 크래커 종류였다. 크림과 버터가 있었으나 손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척 보아도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는 외견에 테오도르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의 행동에는 어색함이 뚝뚝 묻어나왔으나,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 넘기기로 했다. 사실 테오도르가 뚝딱거리며 어색하게 행동하는 게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는 크래커에 크림을 발라 테오도르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가 받아먹지 않을 걸 알면서도 놀릴 생각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아, 하세요.”

    테오도르가 크래커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손을 뒤로 빼냈다. 가면 너머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가면무도회잖아요.”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해 보고 싶었다고 조용히 덧붙이자 테오도르가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쥐고 끌어당겼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입 크기로 잘린 크래커는 입에 쏙 들어갔다. 손가락 끝에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테오도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속눈썹 때문에 시선이 가려져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가 손을 빼냈다.

    손가락 끝에 신경이 모여, 마치 심장이 검지에 달린 것 같았다.

    “카를라 님?”

    테오도르가 이름을 불렀는데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먼저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사람의 심장을 쥐었다 놓는 건 그의 잘못이었다. 나는 뻔뻔스럽게 테오도르의 탓을 했다. 이래서야 그가 귀걸이를 눈치챌 수도 없겠다 싶어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맛은 괜찮나요?”

    테오도르가 눈을 휘어 웃었다.

    “네, 무척 달았습니다.”

    그 미소에 나도 크래커에 크림을 발라 베어 물었다. 크래커도 크림도 달지 않았다. 그냥 그런 맛이었다.

    곡이 시작하자 테오도르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 곡이 마지막 곡이라는군요.”

    가면무도회는 이른 저녁에 시작해 밤이 되기 전에 끝나는 모양이었다. 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짝을 지어 늘어 서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피데스와 미셸 남작도 보였다.

    느릿한 곡이 부드럽게 흘렀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귀걸이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 생각뿐이었다.

    “카를라 님, 뭔가 신경 쓰이시는 게 있으십니까?”

    내가 멍하니 몸을 움직이기만 하자, 테오도르가 먼저 물었다. 어디가 아픈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퉁하게 뱉었다.

    “저 어디가 달라졌는지 아시겠어요?”

    귀찮은 화법이었다. 겨우 귀걸이 하나 걸어 놓고는 어디가 달라졌는지 찾아보라고 유난을 떠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그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가,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구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멋대로 기대했다가 멋대로 실망하는 꼴이 우스웠다. 테오도르가 내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그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 나빴다.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걸이를…….”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를 수습한 테오도르가 마저 말을 이었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은 귀걸이를 하신 것밖에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웃음이 터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분이 멋대로 휙휙 돌아갔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게 내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닐까.

    “네, 맞아요. 귀걸이를 해 봤어요.”

    테오도르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마주 웃었다. 그는 이전보다 편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평소에는 귀걸이를 걸지 않으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알레르기가 있어서 평소에는 하지 못해요. 그렇지만 오늘은 좀, 특별하니까.”

    대놓고 테오도르를 시험하려고 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내 속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귀걸이를 하신 모습도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평소에도 하고 다니면 좋을 텐데.”

    이 세계에 와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화려한 장신구와 옷을 마음껏 입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반짝이는 귀걸이를 끼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하녀들이 기다란 귀걸이를 끼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그러니까 카를라 님의 이전 생에서는 귀걸이를 즐겨 착용하셨습니까?”

    테오도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매일매일 바꿔 끼울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은 겨우 진주 귀걸이, 그것도 관리되지 않아 색이 바랜 것뿐이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테오도르는 아차 싶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춤이 끝나자, 파트너를 찾은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희비가 명백하게 갈렸다. 파트너를 찾은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며 홀을 빠져나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구석에서 말싸움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날 못 알아볼 수 있어?”

    “여자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벽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남자가 여자를 못 알아봐서 마지막 곡을 함께 추지 못한 것 같았다. 둘은 목소리를 점점 더 높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적거리며 그들의 싸움을 관람했다.

    “다신 말도 걸지 마!”

    마침내 큰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얼마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마찰음이 요란하게 났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작았지만, 선명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재미있게 즐겼어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쓴 여자가 재차 말을 걸었다.

    “아, 저 치정 싸움 말고요. 가면무도회요.”

    그제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즐거웠어요.”

    “다행이네요. 이런 곳은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퍽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낯익은 말투였으나 얼굴을 가려서 그런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나이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눈을 찌푸리며 가면 너머의 얼굴을 보려고 애쓰자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카를라! 저예요! 이본!”

    “이본?”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녀가 몸에 걸친 것을 아무리 보아도 노란색은커녕 비슷한 색도 보이지 않았다.

    “가면무도회잖아요. 정체를 숨겨야죠.”

    가면 너머로 오른쪽 눈이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나는 그제야 화려한 이본과 그녀를 매치시킬 수 있었다. 검은 드레스에 수수한 장신구라니, 상복을 입은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오래간만이에요, 이본. 잘 지냈어요?”

    “덕분에요. 으음, 저기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방금까지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있었다.

    “남의 싸움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요.”

    “몰랐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 물 구경, 싸움 구경이라잖아요. 특히 사랑싸움이면 더 좋고.”

    이본이 화사하게 웃었다. 등에 한기가 돌았다.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싸움 구경이 별로면 카를라와 성기사님의 연애 이야기라도 들려주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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