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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6)화 (10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6화

    춤이 끝나자마자 피데스 소공작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내게 따지듯 물었다. 주변을 의식한 듯 한껏 낮춘 목소리였으나 얼마나 따지고 싶었는지 목소리가 널을 뛰었다.

    “언니, 이게 무슨 짓이야? 가면무도회가 왜 가면무도회인지 몰라?”

    그녀는 내가 미셸 남작에게 자신의 정체를 홀랑 말해 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정답을 말해 주는 대신 다른 말을 건넸다.

    “난 네 옷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더 궁금한데?”

    노골적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피데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구두를 제외하고는 온통 내 물건이었으니 이 정도의 심술은 부려도 될 것 같았다. 피데스는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협박했니?”

    “그럴 리가 있어?”

    피데스는 시치미를 떼었지만,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럼 내 전담 하녀가 멋대로 옷을 꺼내 준 모양이구나. 가서 매를 때려야겠다.”

    으름장을 놓자 그녀는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언니가 허락했다고 거짓말을 했어. 걔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매를 들어.”

    카를라가 사용인들에게 쉽게 매를 들지 않았던 이유가 오롯이 백작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가풍의 영향도 꽤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데스는 벨이 자신 때문에 매를 맞게 될까 봐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때리면 안 돼. 알았지?”

    “누가 들으면 내가 재미 삼아 하녀를 매질하는 줄 알겠구나.”

    그녀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곧 곡이 시작될 것 같은데, 네 파트너가 기다리겠구나. 어서 가 보렴.”

    피데스를 뒤따라 온 미셸 남작은 가면 너머로도 보일 만큼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데스는 그를 힐끔거리며 내게 다시 당부했다.

    “혼내지 마. 알았지?”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녀는 미셸 남작에게 돌아갔다. 미셸 남작은 언제 퉁명스러운 얼굴을 했냐는 듯 뻔뻔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가면을 썼는데도 표정이 다 보이네.’

    미셸 남작이 뭐라고 말했는지 피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미셸 남작이 몇 마디를 더 건네자 이내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보아도 귀여운 한 쌍처럼 보였다.

    ‘귀엽긴.’

    작게 웃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시선을 피데스에게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말을 돌렸다.

    “피데스 소공작이 먼저 경을 알아봤나요? 테오도르 경은 얼굴도 안 보이는데, 재주도 좋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 운을 띄우자, 테오도르가 미소를 지었다.

    “옷과 장신구는 카를라 님의 것인데, 걸음걸이가 달라 의아해서 먼저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눈썰미가 아무리 좋아도 걸음걸이를 보고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니.

    “걸음걸이요?”

    의아하게 되묻자 테오도르가 춤을 추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나는 그가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의 어깨를 가만히 잡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카를라 님은 기사처럼 걷지 않으니까요.”

    고작 걸음걸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쩐지 무척 야릇하게 들렸다. 내가 걷는 모습을 그가 빤히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내리깔았더니, 그가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카를라 님의 뒷모습을 유심히 봤다는, 그런,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저 좋아하는 분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을 가볍게 더듬기까지 했는데, 다행히도 때맞춰 음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리듬에 맞춰 발을 옮겼다. 곡은 점점 더 빠르게 달려갔다. 내 심장도 그에 맞춰 달음박질했다.

    그의 눈을 보며 몸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니 마치 마법에 걸린 듯했다. 주변 풍경은 이리저리 바뀌는데, 테오도르만이 변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뭐든 허락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곡이 정점에 달했을 때, 테오도르가 내 허리를 꽉 붙들고 몸을 밀착했다.

    그의 품에서는 비누 냄새가 났다. 동시에 그의 가슴팍에서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뜬금없는 포옹이었으나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연이어서 연주되는 곡은 느릿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도 물어봐 주세요.”

    “무엇을요?”

    “제가 어떻게 테오도르 경을 찾았는지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저를 어떻게 찾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눈이 제일 예쁜 사람이 있어서 누군지 확인하려고 했더니, 이게 웬걸, 테오도르 경이더라고요.”

    나는 뻔뻔스럽게 말하며 그를 놀렸다. 눈이 얼마나 예쁜지 저 멀리서도 알겠더라, 세상에 테오도르 경의 눈보다 예쁜 보석은 없을 것이다 등등. 아직 심장 박동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지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전부 엉망진창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우연이었어요. 테오도르 경이랑 눈을 마주치기 전에는 누군지 몰랐거든요.”

    사실대로 실토하자 테오도르가 짧게 웃었다.

    “위대한 분의 안배군요.”

    우연이라니까, 하고 투덜거렸으나 그는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광신도 같으니. 나는 차마 테오도르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어 속으로 신을 욕했다.

    ‘걘 리자 말고는 관심도 없을 것 같은데.’

    매사에 신을 찾는 건 성기사들의 습관인 것 같았다. 그가 내 표정을 살피다가 덧붙였다.

    “저는 기쁩니다.”

    “뭐가요?”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저를 알아봐 주셨다는 것이요.”

    테오도르는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의 반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데도 잘생긴 남자의 미소는 파급력이 컸다. 눈부신 미소에 눈을 뜨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나는 애써 대답했지만, 가볍게 한 말에도 기뻐하는 테오도르가 미치도록 귀여워 더는 놀릴 수가 없었다.

    * * *

    테오도르의 품에 안긴 탓인지 가면이 삐뚤어져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가면을 고쳐 쓸까 했지만, 내가 건들면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테오도르에게 양해를 구했다.

    “가면이 흘러내릴 것 같아요. 다시 묶고 올게요.”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여성 휴게실까지 따라오려고요?”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알아요. 엇갈릴까 봐 걱정한 거죠?”

    나는 키득거리며 그를 안심시켰다.

    “엇갈려도 제가 다시 테오도르 경을 찾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기다리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아쉬워하며 허리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휴게실로 향하는 여성들의 무리에 섞여 복도를 걸었다. 그들은 가면을 얼굴에서 크게 떨어트리지 않고도 능숙하게 부채질을 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해 볼까 싶어 가면에 손을 얹었다가 내렸다. 실수로 가면을 떨어트리면 창피할 것 같았다.

    “백작님, 다녀오셨어요.”

    “응, 가면이 떨어질 것 같아서.”

    다른 하녀와 이야기하고 있던 벨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끈이 삐뚤어졌네요. 금방 다시 묶어 드릴게요. 화장도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다른 지시 없이도 능숙하게 가면을 벗겨 주었다. 아무리 얇은 가면이라고 해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한참 동안 차고 있으니 화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벨은 왼손으로 가면을 가볍게 흔들어 부채질을 해 주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완벽하게 화장을 고쳐 주었다.

    ‘대단해,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솜씨에 넋을 놓고 있는데, 벨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귀걸이를 몇 점 들고 올 걸 그랬어요. 소공작님도 귀걸이가 없냐고 찾으시더라고요.”

    “아, 그래. 그러잖아도 소공작님이 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봤단다.”

    벨이 숨을 들이켰다. 내가 아직 피데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듣지 못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주근깨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백작님의 물건을 함부로 타인에게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소공작님께서 백작님의 허락을 받으셨다고 하셔서 저는…….”

    그녀는 랩을 하듯 속사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달랬다.

    “이깟 일로 네게 뭐라고 하겠니. 그냥 봤다고 말하는 거니 걱정하지 말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데스에게 옷을 준 것 가지고 크게 혼을 낼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카를라의 동생이 요청한 걸 벨이 안 된다고 우길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고.

    나는 벨을 달래려다가 그녀의 귓가에서 흔들리는 귀걸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길게 늘어져 달랑거리는 귀걸이는 언젠가 백작을 골리기 위해 집안 하녀들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벨, 귀걸이 잠시만 좀 빌려줄래? 금방 하고 돌려줄게.”

    “하지만 백작님은 귀걸이를 하시면…….”

    “응. 그러니까 잠시만 하고 돌려줄게.”

    벨은 망설임 없이 귀걸이를 빼내 제 치마로 닦은 뒤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귀걸이를 받아 귀에 걸었다. 금속이 귀에 닿는 묵직한 감각이 생소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나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테오도르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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