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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5)화 (105/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5화

    남자와 나는 손을 잡고 다시 홀로 향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시다고요.”

    경쾌한 음을 따라 발을 놀리며 그가 물었다. 나는 주변의 움직임을 따라 돌며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는 많았지만,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여자는 그리 흔치 않았다.

    “네, 제가 찾는 분도 비슷해요. 검은 머리,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오늘은 흰 제복을 입고 왔어요. 아, 검을 차고 있어요.”

    성기사라고 말하면 내가 누구인지도 밝히는 꼴이라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 제복, 검, 큰 키. 흔하지 않군요.”

    우리는 서로의 어깨 너머로 사람들을 훑어보며 소곤거렸다.

    “분홍색 드레스에 분홍색 가면을 쓴 분이 계세요.”

    “사자 가면을 썼습니다. 다만 칼이 없군요.”

    춤을 추며 몸을 틀면 서로가 말한 사람을 확인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기를 반복했다. 어릴 적 했던 캐릭터 찾기 게임 같았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훑어보는데, 익숙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얼핏 연한 개나리색처럼 보이는 드레스였으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건 내가 오늘 입고 온 드레스였다. 주변 색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 원래는 옅은 베이지색인 것이 분명했다.

    ‘같은 옷인가?’

    같은 옷을 샀을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맞춘 옷은 재단사가 몇 가지 가공을 더한 물건이었다. 가는 몸을 가리기 위하여 치마에는 주름을 잔뜩 잡고, 어깨와 소매는 과감하게 부풀려 유행하는 드레스와는 모양이 확연히 달랐다.

    ‘벨이 다른 사람에게 내 옷을 내준 건가?’

    내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검은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리고 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좀 더 좋은 것만 뺀다면 카를라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어딘가 사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차고 있는 장신구도 내가 바꿔 낄까 하다가 내려놓은 것이었다.

    ‘세상에.’

    나는 순식간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피데스 소공작이잖아!’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피데스 소공작이 아니라면 더 문제였다. 벨이 내 옷을 아무에게나 건네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중에 벨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데스가 이곳에 와 있다면, 나와 춤을 추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도 짐작이 갔다. 나는 그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분이 혹시 피데스 소공작님이신가요?”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역시나, 광대 가면을 쓴 남자는 미셸 남작이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했어.’

    몇 번 보지 못한 상대라 가면을 쓴 것만으로도 못 알아본 것이다. 가면무도회라고 해서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에게 속삭였다.

    “두 분이 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지셨는지 꼭 듣고 싶네요.”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동생과 좋은 관계인 남자인데 이때껏 몰랐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면에 달린 방울이 흔들거리며 소리를 냈다.

    ‘누군지 알고 보니까 정말 안 어울린다.’

    미셸 남작과 광대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나는 볼 안쪽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미셸 남작님 아니신가요?”

    “맞습니다.”

    그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보니 가면 너머로 그의 이목구비가 보이는 듯했다. 나는 즐겁게 그의 어깨너머로 피데스의 동선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재밌다.’

    피데스 또한 다른 사람과 춤을 추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는데, 보나 마나 미셸 남작을 찾는 게 뻔했다. 그녀도 우리처럼 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보다 홀 가장자리의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남의 연애를 구경하는 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나는 그녀가 어떤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지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는 투구처럼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가면에 붙은 깃털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 색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코 아래로 보이는 단정한 입매나 날렵한 턱선이 그가 미남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피데스와 그가 춤을 추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아는 사람인가?’

    피데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까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피데스와 함께 파티에 간 적은 많지 않으니 금방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언제 본 장면인지 금방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너무 빤히 바라본 탓인지 피데스와 춤을 추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색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색이었는데, 호수처럼 깊고 푸르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본 눈동자는 햇살을 받은 호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테오도르다.’

    그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테오도르였다.

    기시감이 든 것도 당연했다. 왕의 생일 연회에서 우리는 똑같이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으니까.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끊기고, 춤을 추던 사람들은 멈춰 서서 서로의 파트너와 인사했다.

    나는 미셸 남작에게 물었다.

    “찾으시는 분은 발견했나요?”

    “아뇨, 아직 못 찾았습니다. 다음 곡도 함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피데스가 옷을 완전히 갈아입었으니 찾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이런, 그건 힘들겠어요. 저는 파트너를 찾았거든요.”

    미셸 남작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축하를 건넸다. 주변 사람들이 다른 파트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자, 그가 물었다.

    “자리로 가십니까?”

    “아뇨, 괜찮으시다면 제 파트너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피데스와 테오도르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이참에 피데스와 미셸 남작이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할 생각을 하니 걸음이 가벼웠다.

    우리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테오도르였다. 그가 눈인사하기도 전에 내가 입을 열었다.

    “기사님, 한 곡 어떠세요?”

    “감사합니다만…….”

    다짜고짜 춤을 권하자 테오도르는 곤란한 듯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권해 오는 춤을 그대로 거절할 수도 없고, 춤 상대를 해 주고 있던 피데스를 두고 갈 수도 없어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순하고 착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피데스가 나섰다.

    “죄송하지만, 다음 곡은 이미 선약이 있습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미셸 남작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긴, 갑자기 파트너를 찾았다고 하더니 남의 파트너에게 행패를 부리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나는 미셸 남작의 손을 그대로 피데스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러면 문제없죠?”

    “레이디, 이게 무슨…….”

    얼떨결에 피데스의 손을 잡게 된 미셸 남작은 항의하려고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가 피데스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흰 드레스도 정말 잘 어울립니다, 소공작님.”

    “이건 흰색이 아니라 베이지색……. 어? 미셸 남작?”

    그는 당황해하는 피데스의 손을 잡고 자리를 옮겼다. 피데스는 나와 미셸 남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그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이제 선약도 없어졌는데, 한 곡 어떠세요?”

    그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입가에 퍼지는 미소가 달짝지근했다.

    “카를라 님은 항상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한 번 정도는 먼저 테오도르 경을 찾고 싶어서요.”

    가면으로 감춰진 얼굴이었으나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내민 채로 새침하게 말했다.

    “아아, 가벼운 손이라 금방 날아갈 것 같은데, 잡아 줄 기사님이 있었으면 좋겠네.”

    장난스러운 말에 그가 금방 내 손 아래로 제 손을 받치며 대꾸했다.

    “레이디, 제게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십시오.”

    “한 곡만요?”

    “마지막 곡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반 발자국 앞으로 섰다. 그와 바짝 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였다.

    테오도르도 반 발자국 다가왔다. 단숨에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언제나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더 아름다우십시다.”

    방금까지 깔깔거리며 그를 놀렸는데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되었다.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농담을 꺼냈다.

    “공주 같다거나, 장미의 요정 같다고 하지는 않네요?”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능숙하게 몸을 움직이며 내게 속삭였다.

    “감히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뺨이 붉은 것 같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간신히 가면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대꾸한 것 외엔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입을 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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