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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4)화 (10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4화

가면무도회의 특성상 누가 주최하는지 알 수 없다지만, 이번 무도회의 주최자는 말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영업시간 이후라도 백화점 홀을 통째로 빌릴 만큼 부유한 사람 중, 이렇게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백화점 홀은 온통 노란 천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얼핏 보면 금으로 장식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높은 층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으나 오히려 화사한 홀과 대비되어 분위기를 돋워 주었다. 한 발자국 들어서니 밖과 완전히 분리된 동화 속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초대장 확인하겠습니다. 백작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신사분은 저쪽의 고양이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초대장을 확인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발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새까만 정장을 입고 노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이본 남작은 취향이 정말 확고해.’

나는 웃음을 참으며 테오도르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잠시 뒤에 보자는 뜻이었다. 테오도르는 윙크를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얌전히 등을 돌렸다. 나는 벨과 함께 사용인을 따라 걸었다.

고양이 가면을 쓴 사용인은 능숙하게 복도 가장자리에 있는 방을 안내해 주었다. 백화점에서 마련한 휴게실인 것 같았다. 사용인은 문을 열지 않고 밖에서 내게 가면을 건네주었다.

붉은 종이로 만들어진 가면은 퍽 단단했다. 장식으로 빨간 코르사주가 달린 것 외에는 특이한 부분이 없었다. 다만 적당한 크기로 뚫려 있는 눈구멍은 끝이 치켜 올라가 사나워 보였다. 이래서야 원래 얼굴과 그리 다를 바도 없었다.

“반대편으로 나가시면 홀이 나옵니다. 홀 안에서는 꼭 가면을 써 주십시오. 마지막 춤까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용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복도를 되돌아갔다. 나는 가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귀에 걸면 되나 싶어 천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자 벨이 들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착용을 도와드릴까요?”

“그래.”

그녀는 옆에 길게 늘어진 천을 이용해 가면을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귀에 거는 게 아니라 천을 머리에 두르고 머리카락을 내려 감쪽같이 고정했다. 시야가 달라져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걷거나 춤을 추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벨이 휴게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휴게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옷을 점검하는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서로가 누군지 얼추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벨, 옷은 잘 챙겨 왔니?”

“네, 갈아입으시겠어요?”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은 나를 힐끔거리기는 했으나, 이내 관심을 거두고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벨에게 챙기게 한 옷은 예전에 맞춘 녹색 드레스였다. 짙은 녹색 드레스는 얼핏 보면 칙칙한 것처럼 보였으나 창백한 피부에는 정말 잘 어울렸다. 화려한 홀에서도 크게 튀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벨이 웃으며 머리를 마저 정돈해 주었다. 나는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새빨간 가면과 녹색 드레스를 입은 나는 카를라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 *

사용인이 알려 준 대로 들어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나가니 홀이 보였다. 안쪽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화려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훑었다. 테오도르를 찾기 위해서였으나 그리 쉽게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이 워낙 많은 데다가 다들 가면을 쓰고 있으니 구별하기 어려웠다.

가면은 가지각색이었다. 여자들의 것은 비슷비슷한 모양이었으나 남자들의 가면은 세상 모든 가면을 다 긁어모은 양 다양했다. 퍼레이드에서나 쓰일 법한 사자 가면부터 광대, 머리카락 색을 구분하기 어려운 공작새 가면, 멋들어지게 왕관까지 쓴 사람도 보였다. 여자들도 가면 위로 다양한 장신구를 늘어트려 가면무도회가 아니라 가장무도회처럼 보였다.

“마녀인가요?”

“아뇨.”

“이런, 너무 아름다우시길래 마녀인 줄 알았습니다.”

광대 가면을 쓴 사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왈츠 한 곡 어떠십니까?”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홀 중앙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말을 걸어 놀라셨을 텐데, 레이디께서 수락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광대와 춤을 추는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춤을 잘 추었으나, 자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탓에 벌써 몇 번이나 발을 밟힐 뻔했다.

“상대에게 집중하셔야죠.”

“죄송합니다.”

“찾는 사람이 있으세요?”

그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뻣뻣한 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네.”

함께 온 파트너를 찾는다며 그는 상대의 외모를 묘사했다.

“검은 머리에, 지금 저와 춤을 추는 레이디보다 한 뼘은 더 큽니다.”

“아마 여기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그런 사람들일 텐데요.”

과장을 덧붙여서 그를 타박하자, 가면에 붙은 방울이 흔들거렸다.

“딱 보면 레이디도 아실 겁니다. 그녀처럼 매력적인 여성은, 실례, 레이디께서도 아름다우시지만, 흔하지 않아요. 매서운 눈은 부정을 용서하지 않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누구보다 정직하죠.”

풍기는 분위기는 고아한 사제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인한 기사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에는 아찔해질 정도였다. 달콤한 말이 줄줄 흘렀다. 질색할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빠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나는 그의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그런 것보다 그분이 오늘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 장신구는 뭘 했는지 말씀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남자가 박자를 놓쳤다. 겨우 몸을 틀어 그의 발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제 파트너는 드레스를 잘 입지 않습니다. 오늘도 정복을 입었죠. 장신구도 하지 않고요.”

나는 흐음,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어 호응했다. 남자의 묘사를 듣고 있자니 머릿속에 어떤 여자가 어른어른 떠올랐다.

‘에이, 설마.’

그러나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며 이내 생각을 지우고, 남자의 파트너를 찾기 위해 주변을 훑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많았으나 다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 쉽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나같이 장신구를 잔뜩 매달고 있어 눈이 어지러웠다. 결국, 나는 남자의 파트너 찾기를 포기하고 춤에 집중하기로 했다.

“파트너분이 그렇게 매력적이신데 왜 저에게 말을 거셨는지 궁금해지네요.”

“눈동자 색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발을 움직이자, 남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저를 놀리기 위해 약간 변장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 파트너의 눈도 흑요석 같거든요. 별이 뜬 밤하늘 같기도 하고.”

흑요석이라니, 별이 뜬 밤하늘이라니. 나는 비명을 삼켰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낭만적인 비유였다. 남자는 내가 질색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분은 레이디처럼 다정하지는 않으셔서요.”

“제가 다정한가요?”

이번에는 헛웃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다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말이었다. 아니면 그와 함께 온 파트너의 인성을 의심해 봐야 할 일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춤 상대를 기꺼이 용서해 주셨으니까요. 제 파트너라면 제 발을 사정없이 밟았을 겁니다.”

“사랑스러운 분이군요.”

“그만큼 무섭기도 하고요.”

그와 그의 파트너는 열렬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춤을 추면서 자신 말고 다른 곳을 보지 말라고 하는 여자라니, 귀엽기 짝이 없었다.

한 곡을 다 출 때까지 그는 파트너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자리로 돌아가십니까?”

“아뇨. 목을 축일까 싶어요.”

“샴페인이 괜찮더군요.”

남자는 나를 홀 안쪽까지 데려다주었다. 사용인에게 샴페인을 한 잔 받아 내게 건네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곡 더 춰 주실 수 있으십니까?”

“찾는 분이 계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 파트너는 저를 찾으면 피해 다닐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가요.”

춤을 출 때 자신을 보지 않으면 심술을 부릴 만큼 귀여운 여자가 그럴 리가 있겠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저를 먼저 발견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그는 파트너를 먼저 찾아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게 꼭 누구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겠죠.”

“도와주시는 겁니까?”

가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남자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는 풋풋한 첫사랑을 앓는 소년처럼 보였다.

“대신 저도 도와주세요.”

샴페인으로 적신 목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나왔다.

“저도 찾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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