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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3)화 (103/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3화

    불도저처럼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놀라 순간 왼쪽 다리가 휘청거렸다. 테오도르가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다.

    “고마워요.”

    나는 들뜬 집사와 벨을 빤히 바라보다가 얼른 자리를 옮겼다. 계속 같은 자리에 있다가는 나도 정신을 놓고 데이트 코스를 짤 것 같았다. 집무실에 쌓아 놓은 서류를 처리하는 동안 테오도르는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보지?’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서류를 처리하고 초대장의 답장을 쓰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는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휙 돌리자,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테오도르 경, 필요한 게 있나요?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길래.”

    그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답이요?”

    멍청히 그를 바라보자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비 맞은 개처럼 그가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카를라 님과 데이트하고 싶은데, 카를라 님은 어떠십니까?”

    “아, 그 이야기였나요? 아니, 아까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요?”

    내가 넘어질 뻔한 것을 도와준 이후로 이야기가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자 테오도르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꺼풀 아래에 그림자가 지자, 우수에 찬 눈동자 위로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를라 님을 곤란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척추 반사적으로 외쳤다.

    “아니요. 안 곤란해요. 해요! 데이트!”

    데이트하자고 호기롭게 외친 건 좋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에도 한 번 그와 데이트를 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확실히 무게가 다르지.’

    언젠가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거리를 뒀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테오도르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풍등 축제에 참여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것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정식’ 데이트를 거친 후에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나는 펜촉으로 종이 위에 톡톡, 자국을 냈다.

    “데이트 신청은 정식으로 하겠습니다.”

    생각에 빠진 나를 꺼낸 것은 테오도르였다. 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정식으로요?”

    “예. 제대로 절차를 밟아 카를라 님께 구애하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할 테니…….”

    신전에 가자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도 나를 데리러 왔다. 진짜 데이트처럼. 그는 구애라는 촌스러운 단어를 쓰면서까지 나와 제대로 절차를 밟아 가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가 더 귀엽게 보였다.

    “그러니 카를라 님도 저를 진지하게, 그런 의미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내게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마구 부딪혀 오는 주제에, 입밖에 이런 말을 낼 때면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보이곤 했다.

    “항상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걸요.”

    그래서 나도 그만 진심을 뱉고 말았다.

    * * *

    테오도르의 데이트 신청 편지는 사흘 후에 도착했다. 집사에게 편지를 맡기고, 마부가 다른 초대장과 함께 옮기는 척 다시 집사에게 편지를 건네고, 집사가 초대장과 함께 벨에게 건넨 후 벨이 화장대 위에 편지를 올려놓기까지 사흘이나 걸린 것이다.

    그동안 나는 차에 치즈를 타 마시기도 하고, 향유로 몸을 몇 번이나 닦아 내기도 했다. 벨은 내가 미용에 관심을 가지자 흥미롭다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나는 더 이상한 미용법을 실행하기 전에 테오도르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감사히 여겼다.

    테오도르의 편지는 길고 길었다. 자신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내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편지를 읽다가 데굴데굴 굴러 일어났다.

    ‘카를라 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가면무도회에 함께 가고 싶으니 허락해 주지 않겠냐는 말을 마지막으로 편지는 끝이 났다. 테오도르의 글씨는 정갈했고, 편지는 틀린 글자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내가 받아 본 첫 연애편지는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런 편지에 답장하기 위해서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유행하는 편지지를 사들여 그중에서 가장 예쁜 것을 고르고, 색이 고운 잉크를 골랐다. 손에 익은 펜인데도 실수할까 봐 몇 번이나 다른 종이에 내용을 옮겨 적었다.

    무슨 말을 적을까 고민하느라 일도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백작님, 숫자에 오류가 있는데 재기입할까요?”

    “응? 응. 그렇게 해 줄래?”

    얼마나 넋을 놓았는지 벨이 지적할 정도였다. 편지를 완성하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테오도르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타협한 결과였다.

    답장에는 나를 좋게 봐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카를라가 아닌 나에 대한 소개를 적었다. 마지막에는 권유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가면무도회는 처음 가 보는 것이라 기대된다는 말도 함께.

    “이 편지를 성기사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다른 저택에서 온 편지처럼 절차를 거쳐서 전달했으면 좋겠군.”

    집사는 알겠다는 얼굴로 지시를 따랐다. 그는 테오도르에게 오는 편지들과 함께 내 편지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도 내가 기다리면서 느낀 두근거림을 느껴 주었으면 했다. 테오도르가 답장을 받을 때까지는 똑같이 사흘이 걸렸다.

    고작 파티에 가는 것뿐인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드레스를 고르고, 장신구를 골랐다. 테오도르는 기사복을 입을 테니 그에 맞춰 연한 색의 옷을 입기로 했다.

    ‘멀리서 보면 연인으로 보일까?’

    집사가 구해 준 가면무도회의 초대장을 보며 피식피식 웃자 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님, 가면무도회는 처음이세요?”

    “응.”

    카를라는 몇 번 가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벨은 제가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내게 끝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면무도회는 남녀 한 쌍의 커플로만 입장할 수 있지만, 입장한 후에는 따로 나뉘어 가면을 받게 된다고 한다. 가면은 무작위로 나누어 주기 때문에 파트너와 한 쌍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파티를 즐기다가 마지막 곡을 추고 나서야 가면을 벗을 수 있다고 한다.

    가면무도회라는 게 거기서 거기지, 나는 심드렁하게 장신구를 골랐다. 벨은 내 머리를 땋았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만난 파트너가 처음 입장한 파트너랑 같으면, 운명이라고 하더라고요. 엄청나게 낮은 확률이니 신께서 맺어 준 것이라나요.”

    그녀는 눈썰미가 좋은 남자라면 파트너의 옷과 장신구를 기억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시니컬하게 뱉었다. 벨은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운명이라는 걸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벨, 드레스를 한 벌 더 준비해 줄래?”

    * * *

    테오도르는 약속 시각에 맞춰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에 맞춰 파트너를 맞이하러 온 신사처럼. 머리를 한껏 빗어 올려 평소보다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름다워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백작님.”

    “언변이 좋으시군요.”

    집사는 이게 무슨 장난이냐는 얼굴로 벨을 바라보았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테오도르가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그가 이끄는 대로 에스코트를 받았다.

    당연히 늘 타던 백작가의 마차를 탈 줄 알았는데, 그는 따로 마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가문의 문양이 전혀 없는, 그러나 요란한 색으로 칠해진 마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차는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분홍색이었다.

    심지어 말도 분홍빛 천으로 몸통을 감싸고 있었다. 마부마저 분홍색 모자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마차의 문이 아랫부분이 잘린 하트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문은 흰 천을 이리저리 붙여 얼핏 보면 레이스처럼 보이도록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 테오도르를 바라보자 그는 뿌듯한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보자 벨과 집사가 입을 떡 벌리고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수치를 주고 싶었나?’

    테오도르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니야. 이건 100% 순수한 호의다.’

    나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테오도르 경, 마차를 왜 따로 빌리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가면무도회의 테마가 공주와 기사라고 해서, 공주를 연상시키는 분홍색 마차를 빌렸습니다.”

    “아…….”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 내가 마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테오도르를 보니 당장이라도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진짜 센스 없다!’

    벨이 조심스럽게 이 마차를 돌려보내고 마부를 부를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손을 내저었다.

    “독특하고 좋네요.”

    “다행입니다.”

    테오도르가 눈을 휘어 웃었다. 순간 유치한 분홍색의 마차가 정말 공주가 탈 법한 마차로 보였다. 환각은 환상처럼 금방 사라졌지만, 여전히 테오도르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나는 테오도르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마차가 저 지경이면 어때. 에스코트할 기사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벨에게는 미안했지만, 마차를 갈아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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