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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2)화 (102/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2화

    왕은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전담 하녀와 호위 기사가 동시에 바뀌면 불편하실 테니, 백작님의 호위 기사는 그대로 두고 왕실에는 다른 성기사를 보내드리면 어떨지요.”

    “호오.”

    왕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게 빚을 만들어 두면서 신전 측에도 자신이 한발 물러선 척 생색을 낼 방법이었다. 왕은 거부하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고 바로 수긍하지도 않았다.

    “어떤가 백작. 그대가 편한 쪽으로 하게.”

    그녀는 선택권을 내게 쥐여 주는 척하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성기사를 완전히 내 호위 기사로 내려주겠다는 것은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왕이 잠시 빌려주는 게 아니라, 신전에서 아예 내게 기사를 파견해 주겠다는 것이었으니까.

    테오도르가 아니라 다른 기사를 보내 주겠다고 하더라도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만한 이야기였다.

    “편의를 봐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죠.”

    입가를 끌어올리며 다시 식기를 손에 쥐었다. 테오도르가 완전히 내 전속 호위 기사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입맛이 확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 * *

    리자를 설득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설득이라고 해도 어차피 위에서 다 정해진 것, 리자에게는 그저 통보나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리자는 호화로운 방에 모셔져 있었다. 나갈 수 없도록 방문 앞에 기사가 둘이나 붙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만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처사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리자는 공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선을 내리깔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은 청아했다.

    ‘하긴, 쟤 신이랑 똑같이 생겼지.’

    괜히 기분이 나빠져 구두 굽을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바쁘니?”

    인기척을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었다.

    “마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다가오려다가 드레스가 무거운지 머뭇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나는 웃음을 참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여기에서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완전 무서웠어요!”

    함께 들어온 시종 두 명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눈치가 없는 리자가 알아차릴 정도면 얼마나 강압적인 상황일까 싶었는데, 다행히 무섭기보다 호기심이 강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 옷을 입혀 주는 건 처음이라서 놀랐어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도 엄청 힘든 거 있죠.”

    그녀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쉴 틈 없이 조잘거리며 습관처럼 내 옷매무새를 살폈다.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슬그머니 물었다.

    “차를 타 올까요?”

    “아니.”

    나는 팔짱을 끼고 어떻게 말을 전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리자가 싫다고 드러눕지 않을까.’

    이미 다 결정된 사항이라고 해도 리자가 싫다고 저항하며 떼를 쓰면 억지로 데려갈 수 없었다. 신이 예뻐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한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왕과 대신관이 내게 그녀를 어르라고 시킨 것이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신전으로 거처를 옮겨야겠어.”

    “신전이요?”

    리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흰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래, 신전. 아마 계속 거기서 살 수도 있고.”

    “저도 따라가나요?”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자는 자신이 아니라 내가 신전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너만 가는 거야.”

    고개를 젓자 리자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져 얼굴의 반을 차지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신전에서 너를 데려가고 싶다더구나. 신과 똑같이 생긴 데다가 신이 널 예뻐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신전 측에서는 다른 곳에 널 뺏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가기 싫다거나 무섭다고 뻗댈 상황을 대비해서 오만가지 협박을 준비했는데, 리자는 산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님. 준비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그녀에게 몇 번이나 물어야 했다.

    “정말 괜찮겠어?”

    “네! 물론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한 거 맞니?”

    “제가 신전에 가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갑자기 인생이 바뀌는 건데, 정말 괜찮다고?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생각 없이 대답하면 후회한다.”

    리자가 작은 머리통을 옆으로 까딱였다.

    “그치만요, 마님. 제가 싫다고 해도 가야 하는 거지요?”

    “그래.”

    “그럼 무조건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미 신전과 왕궁은 그녀를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해서 계획을 다 짜 놓은 상태였다. 리자가 싫다고 떼를 쓰면 조금 곤란해지긴 하겠지만 끌고 갈 수도 있었고.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리자가 헤헤 웃었다.

    “무섭기는 하지만, 신전에서 밥을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대책 없이 해맑은 리자를 보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니?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데.”

    리자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쁘게 생각하면 끝이 없잖아요, 마님.”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라면 싫다고 울어도 가야 하는 거고, 그럴 바엔 그냥 가는 게 마음이 편한걸요. 그리고…… 마님한테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마지막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신전에 가면 마님에게 도움이 되는 거 맞죠? 저도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아요.”

    신이 가장 예뻐하는 피조물답게, 이 소설의 여주인공답게 그녀는 꿋꿋하게 말했다. 내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나한테 맞고 구박받기만 했으면서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도 모르게 툭 뱉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살면 분하지 않아?”

    “그게 왜 분해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에 나는 이마를 짚던 손을 떼었다. 나라면 내가 왜 내 집, 내 직장 놔두고 너희들 마음대로 이용당해야 하냐며 아득바득 거품을 물었을 터였다. 그러나 리자는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리자는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조잘거렸다. 나도 그녀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남 일인데 그냥 신경 쓰지 말자.’

    대신 퇴직금과 사직서에 대해서 그녀에게 꼼꼼히 알려 주기로 했다. 내가 사무적으로 서류에 대해 읊자 리자가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요, 마님.”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운을 띄우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도 월급 나오나요?”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가 헤헤 웃었다.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신전에 가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렴.”

    신이 예뻐하는 피조물이고 뭐고, 리자는 리자였다. 여전히 쓸데없이 해맑아서 사람의 속을 긁어 놨다. 나는 방을 나서기 전,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뱉었다.

    “거기 가서는 맞고 다니지 말고.”

    리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기운차게 대답했다.

    “네!”

    * * *

    대신관은 귀한 인재를 모셔 가서 싱글벙글, 왕은 신전과 나에게 빚을 하나씩 지워서 싱글벙글했다. 나 또한 기분이 좋았다.

    합법적으로 테오도르가 내 호위 기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보냈던 성기사를 일개 백작의 호위로 보내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다. 대신관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신에게 다 맡기라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으면 엄두가 나지 않을 절차였다. 어지간히 기분파인 모양이었다.

    나는 테오도르를 슬쩍 곁눈질했다. 그는 표정을 잘 갈무리하고 있었으나 한쪽 눈썹이 살짝 들린 것으로 봐서는 속으로는 기뻐하는 게 틀림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전에 없이 구두 끝으로 마차 바닥을 톡톡 치거나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는 모양이 그랬다. 벨은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기사님,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셨습니까?”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마부가 대신 질문했다. 테오도르는 잘 물어주었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정식으로 카를라 님의 호위 기사가 되었습니다. 곧 신전에서 정식 명령서가 내려올 겁니다.”

    마부와 벨은 소리 없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번져 나갔다. 새로 고용한 집사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감격했다.

    “제 인생에서 성기사를 정식 호위로 두는 주인님을 또 모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신이 나서 내게 파트너와 함께 입장해야 하는 파티를 줄줄 읊어 주었다. 정식 호위라면 파트너 취급을 할 수 있으므로, 이를 자랑하기 위해 선택한 파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오묘했다.

    왕실에서 오래 일했다는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어느 가문의 초대장이든 다 구할 수 있으니 말만 하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정말로 집사님은 어느 초대장이든 구할 수 있으신 거예요? 가면무도회도요?”

    “물론이죠.”

    벨은 흥분한 집사를 말리기는커녕 은근슬쩍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파티긴 해도 데이트 삼아 즐기는 사람이 많아 매번 거부하던 곳들에 대해 줄줄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들은 테오도르와 내가 좋은 사이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집사, 그대의 의욕은 알겠지만, 테오도르 경이 곤란해하지 않나.”

    테오도르의 이름을 들먹이며 집사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나는 테오도르를 곁눈질하며 얼른 말려 보라는 시늉을 했다.

    “가만히 있다간 아예 데이트하라고 등까지 떠밀겠는데요.”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한껏 휘어 웃고 있었다.

    “테오도르 경?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내가 묻자 테오도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카를라 님과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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