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1화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몰려왔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다음날이었다.
“백작님, 치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에서 깨기 무섭게 시종들이 들어와 몸치장을 도왔다. 그들은 씻기는 것부터 옷을 입히는 것까지 척척 해치웠는데, 얼마나 능숙한지 매일 그들에게 시중을 받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떠들어 대자 화장을 하기도 전에 지치고 말았다.
“머릿결이 정말 고우시네요. 향유를 바르면 더 보드라워질 거예요.”
“고개를 조금만 들어 주시겠어요? 시선은 손가락 끝에 두시면 됩니다.”
뭘 어떻게 발랐는지 거울 너머의 카를라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가 화장을 해 주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눈초리가 올라간 가는 눈이 두 배는 커져 보이고,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얇은 입술은 원래 분홍빛이었던 것처럼 통통하게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무척 마음에 들어.”
마음 같아서는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내 머리카락에 장신구를 달아 주고, 목걸이와 팔찌를 몇 개나 걸어 주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시종들은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걸어 주려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그들은 물건을 챙기곤 방을 나섰다. 개중 직위가 높아 보이는 시종 하나가 남아 왕의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함께하고 싶으시다고 전하십니다.”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다오.”
마지막 한 명이 방을 나가자마자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랑 대화하기 싫다.’
싫어도 왕이 하자고 하면 해야 했다. 나는 소파에 깊숙이 앉아 시종들이 가져온 책을 의미 없이 넘기기를 반복했다.
‘만나서 뭐라고 말하냐.’
죽고 싶지 않다면 카를라로 살면 된다니, 그건 나를 통해 카를라를 그리워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왕에게 내 영혼이 그녀의 영혼과 같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했다.
‘괜히 말했어. 그냥 방법이 없다고만 말할걸.’
다른 사람인 척 사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가족들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이 콕콕 찔리기도 했다.
언젠가는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걸 공작가 사람들에게도 말해야 할 것이다.
‘화해하지 말걸.’
과거의 행동을 아무리 후회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고 말하면 공작 부부는 뭐라고 말할까. 미쳤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불쌍한 딸의 영혼을 돌려 달라고 화를 낼까.
‘신이 영혼이 같다고 말했으니 죽이려고 하지는 않겠지.’
진실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얼마나 괴로워할까. 우리 엄마한테 똑같은 말을 하면 기절하거나 사기꾼이라며 멱살을 잡을 텐데. 엄마가 등을 마구 때리는 것을 상상했더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책을 정리하던 벨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백작님, 모시러 왔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멀었으나,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 * *
“백작, 인사가 늦었습니다. 위대한 분의 종입니다.”
“말씀을 낮추셔요, 대신관님. 경황이 없어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카를라 백작입니다.”
왕이랑 밥 먹는다며. 나는 왕을 곁눈질로 노려보며 애써 입가를 끌어올렸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수염이 하얀 노인이었다. 정확히 그의 수염은 흰색이 아니라 회색에 가까웠는데, 정갈하게 입은 흰 제복 때문에 지저분하게 보였다.
“위대한 분의 말씀을 들으셨다지요.”
“네, 그렇습니다.”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몰랐다. 대신관이라면 신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내가 상대할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는데 말을 주고받고 있자니 긴장으로 떨렸다. 왕과 처음 대화할 때와 같았다. 왕의 생일 연회에서 본 적이 있나 기억을 뒤지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직접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 폐하께 부탁드렸더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군요. 갑자기 이런 늙은이와 식사를 하게 되어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책만 봐서 그런지 혓바닥이 길었다. 요컨대 왕이 마련한 자리니 불만을 느끼지 말라는 말이었다. 어차피 백작보다 높은 사람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말이 긴 걸까. 나는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불편이라뇨. 대신관님과 말씀을 나눌 귀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인걸요.”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웃음을 거둔 대신관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왕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지 전혀 모르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신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뭔가를 바라는 순간 그건 왕한테 뜯어내라고 넘겨야지.’
나는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며 대신관에게 네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여 보였다.
“위대한 분께서 백작의 전담 하녀를 아낀다고 들으셨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분의 말씀이 분명합니까?”
나는 경건한 자세로 손을 가슴팍 가까이 대고 모아 쥐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감히 폐하와 대신관님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겠습니까. 신께서는 그녀를 두고 ‘귀여운 내 창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오, 하고 대신관이 감탄사를 뱉었다. 눈 가장자리가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대신관의 얼굴에 감격이 뚝뚝 떨어졌다.
“역시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군요. 미안합니다, 백작. 혹여 이 늙은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여 백작에게 거듭 확인해 봤습니다.”
마침내 그가 본심을 꺼냈다.
“백작의 전담 하녀를 기적의 성자로 신전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마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 주변에는 앞뒤 말을 다 잘라먹는 사람들밖에 없을까.
대신관의 말은 이러했다.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리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었으니 그야말로 기적이다. 그런데 신과 리자가 똑 닮은 것을 보니 그녀는 분명 성자가 틀림없다. 그러니 리자를 신전에서 모셔야겠다는 소리였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 눈이 그렇게 광기에 젖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적의 성자라니, 유치한 이름에 웃지도 못할 정도였다. 대신관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압박했다.
“요 몇 년, 위대한 분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무역이 발달한 곳의 신앙심이 처참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마음이 아프던 참이었지요. 바닷사람들이 워낙 미신을 좋아하니 말입니다.”
대신관은 왕이 선박에 투자해 신앙심이 낮아진 게 아니냐고 돌려 말하기까지 했다. 트집이나 다름없었으나 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신관이 저래도 되나. 그는 왕을 힐끔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분께서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성자님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게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신이 리자를 너무 좋아해서 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든, 리자가 신을 닮아 예뻐하는 것이든 분명 신은 별생각이 없을 게 분명했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리자를 신전에 보내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바로 왕이 끼어들었다.
“과감한 결정이군, 백작. 전담 하녀가 한 명 없어져 불편할 테니, 왕실에서 당분간 사람을 보내 주겠네.”
미리 대신관과 대화를 끝내 놓은 게 분명했다. 그녀의 속셈은 눈에 빤히 보였다. 집사도 그렇고 전담 하녀도 그렇고, 내 옆에 자신의 사람을 붙여 감시하겠다는 의도 같았다.
나는 당황한 척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폐하. 너무 폐를 끼치게 되는걸요.”
왕의 눈썹이 까딱였다. 무슨 수작이냐는 듯, 그녀가 묘한 표정을 했다. 나는 눈을 과하게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작이 죽고 나서는 도통 보여 줄 곳이 없던 얄미운 표정이었다.
“저는 바깥나들이도 많이 나가지 않으니까요.”
“그럼 다른 호위 기사를 붙여 주는 건 어떤가? 테오도르가 복귀해도 불편하지 않도록 다른 기사를 붙여 주지.”
왕은 거의 반협박처럼 말했다. 테오도르는 원래 신전이 왕에게 보내 준 기사니 왕이 한마디만 한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대신관이 테오도르를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성기사 한 명이 백작님을 지키고 있었지요? 폐하께서는 정말 앞날을 내다보시는 게 아닌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네, 테오도르 경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는지 몰라요.”
나는 백작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부분을 쏙 빼놓고 마차의 바퀴가 빠졌던 이야기를 가볍게 늘어놓았다. 다행히 말솜씨가 나쁘지 않았는지 대신관은 연신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위대하신 분의 가호가 없었더라면 큰일이었겠습니다.”
“정말이지 감사하고 있답니다.”
나는 신실한 신자처럼 손을 꽉 쥐고 눈을 내리깔았다. 대신관은 으음, 하고 길게 신음했다. 그러곤 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