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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0)화 (100/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0화

‘왕도 이 세계 일원이라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욕을 속으로 삼켰다. 남에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라고 말하면서도 목소리는커녕 손가락 끝도 흔들리지 않는다.

“카를라.”

왕이 카를라를 불렀다. 나는 카를라가 아니었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철학 수업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영혼의 본질은 같지만 살아온 삶과 기억이 다른 사람을 나로 인정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나와 그녀를 동일 인물이라고 인지한다면, 정말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는가. 대학생 때 이런 시험 문제가 나왔다면 백지 시험지를 냈을 게 분명했다.

‘나랑 카를라가 다른 사람인 걸 제일 먼저 알았으면서.’

나는 왕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가 나와 카를라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알아차렸기 때문에 내가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웠는데, 이제 와 말을 바꾸는 건 치사한 일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면 어쩌려고.’

헛웃음을 치자 왕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뒀다.

“그래, 지금은 혼란스럽겠지. 늦었으니 일단 쉬게. 방을 마련해 놓으라고 하지.”

그녀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했다. 왕은 믿고 싶은 것이다. 카를라가 죽거나 사라진 게 아니라, 그냥 기억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 왕은 응접실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으나 나는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왕이 방을 나서자 시종들이 들어왔다. 벨도 함께 들어와 흐트러진 옷을 정돈해 주었다.

“백작님, 별실로 모시겠습니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발로 이 응접실을 나가면, 다시 남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아무렇게나 휘둘릴 것 같았다.

“리자는?”

“대신관님이 물어볼 것이 있다고 다른 방에 있어요. 최대한 빨리 돌려주신다고 했어요. 백작님이 찾으신다고 전할까요?”

“아니, 됐어.”

나는 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밖에서 시종들이 떠들어 대느라 그녀도 들은 게 있을 텐데,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평소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나만 부유하는 묘한 기분.

발을 떼기가 무서웠다. 이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벨.”

“네, 백작님.”

“현기증이 나서 지금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니 먼저 가서 방 정리나 하고 있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테오도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등과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은 그가 나를 정중하게 안았다. 나는 몸을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벨을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다.

“방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러나 벨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등을 돌렸다.

“네.”

전담 하녀의 차가운 배신에 몸을 늘어트렸다. 테오도르가 자상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니,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테오도르는 쉽게도 응접실을 벗어났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벨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지만 변명하지는 않았다. 무서워서 응접실을 나가지 못한 겁쟁이보다 허약한 여자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안내받은 귀빈실은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준비된 방이었다. 테오도르는 나를 긴 소파 위에 내려주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벨은 언제 요청했는지 순식간에 의사를 데려왔다. 나는 그녀의 철저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더니,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다.

“백작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의사는 돌팔이 같아요.”

벨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벨이 리자에게 물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현기증이 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의사를 무르게 하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쑤셔 넣었다.

“벨.”

“네, 백작님.”

“차 한 잔만 끓여와 줄래? 아무래도 소란스러운 곳에 오래 있다 보니까 머리가 아팠던 것 같아.”

왕궁에서 내주는 차가 네가 끓이는 것보다 못해서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다고 덧붙이자, 벨이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반쯤은 빈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녀가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벨은 차를 끓이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나는 전보다 더 몸을 풀고 소파와 완전히 동기화되었다.

“카를라 님, 괜찮으십니까?”

“맨날 괜찮냐고만 묻네요. 괜찮아 보여요?”

내가 실없이 농담하자 테오도르가 표정을 굳혔다.

“아니요. 힘들어 보이십니다.”

“맞아요. 어느 성기사님이 저를 번쩍번쩍 들어 올려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내 옆으로 와 그늘을 만들었다. 아까는 멋대로 몸을 들어 올리더니 다시 생각하니까 미안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과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요.”

나는 킬킬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미안하면 손이나 좀 잡아 줘요.”

“예?”

테오도르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손을 잡아 주면 머리가 덜 아플 것 같아요.”

나는 그가 거부하지 못하게 엄살을 피웠다. 머리가 아픈 건 신이 한 헛소리와 왕의 태도 때문이었지만, 뻔뻔스러운 게 내 장점이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내 손에 닿았다. 그의 손은 컸고, 검을 드는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여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 마디를 살살 쓰다듬자, 테오도르가 신음을 뱉었다.

“카를라 님…….”

나는 모르는 척 실컷 그의 손을 더듬었다. 나도 그도 서로 좋아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냐는 알량한 생각이었다.

‘아. 그나마 좀 살 것 같다.’

복잡했던 심정에 한 줄기 위안과도 같았다.

“있잖아요.”

“네, 카를라 님.”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신이 나보고 카를라래요.”

이미 왕에게 했던 말을 들어 알고 있을 테지만, 일부러 한 번 더 말했다. 내 입으로 들려주고 싶어서. 남의 대화에서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전생이라고 알아요?”

“신전에서 짧게 가르치기는 합니다.”

“내 전생이 카를라래. 카를라가 환생하면 내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냥 들어요.”

테오도르가 말을 정정하자 나는 바로 말을 잘랐다. 나는 그냥 신을 욕하고 싶은 거지 맞다 아니다를 논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얌전히 뒷말을 삼켰다.

“심지어 카를라가 원해서 나랑 바꿔 준 줄 알았더니, 리자가 예뻐 죽을 것 같아서 멀쩡히 잘 살던 사람을 여기다가 쑤셔 박은 거래요. 이게 신일까요? 신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내가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자, 점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인간쓰레기, 아니 신 쓰레기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까 한 대 때려 줄 걸 그랬어요. 정신이 없어서 못 때렸네.”

신실한 성기사의 표정이 나쁘건 말건 나는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죽으면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렇다고 지금 죽겠습니다, 안녕! 하고 죽을 수도 없잖아요. 말이 되냐, 말이. 결국, 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는 소리……. 테오도르 경?”

그러다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의 표정을 살피자, 그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부라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어요?”

“죄송합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늘따라 나한테 미안할 일이 많네요. 내가 심란한 게 좋았어요?”

“아닙니다. 카를라 님이 떠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더니 저도 모르게 안심해서 웃었던 것 같습니다.”

“와…….”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오도르가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프게 손을 움켜쥐었지만, 그는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진짜 치사한 거 알아요?”

투덜거리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래도 손은 허공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테오도르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러면 화도 못 내겠잖아.”

나는 쓰게 웃었다.

“미안해요. 화풀이했어요.”

“아닙니다.”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얼굴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안 나서 짜증 났는데 테오도르가 웃어서 시비 건 거예요.”

테오도르를 놀리는 건 일종의 어리광이나 다름없었다. 칭얼거리며 날 좀 귀여워해 달라는 어린애 같은 생떼였다.

“그러니까 벨이 돌아올 때까지 손 좀 더 잡고 있어도 돼요?”

테오도르의 얼굴에 미소가 사르르 녹았다. 아몬드 모양의 갸름한 눈이 곱게 호선을 그렸다.

“원하시는 만큼 얼마든지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 살면 좋은 거 하나는 확실하네.’

내가 언제 이렇게 잘생긴 남자 손을 잡아 보겠냐. 나는 벨이 돌아올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손은 따뜻하고 든든해서,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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