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9)화 (9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9화

    똑 닮은 미인 두 명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흔히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 시종들은 무슨 신성한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왕과 대신관까지 무릎을 꿇고 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씨구. 촌극이 따로 없었다. 나는 다시 오르는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바라봐서 그런지 조각상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음, 예쁘네.’

    아무래도 나는 얼굴에 꽤 약한 편인 것 같다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왜, 왜 그래요?”

    현기증이 났나, 아니면 신이 수작질한 건가 싶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테오도르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제 얼굴을 가리려던 것도 잊고 나를 부축했다.

    “갑자기 일어나시면 위험합니다.”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까보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스스로 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조금 더 그의 품에 안겨 있기로 했다.

    “테오도르 경이 갑자기 눈을 가리길래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요.”

    “아, 그건…….”

    그가 머뭇거렸다. 아픈 건 아닌 것 같았다. 혈색이 좋은 뺨과 초점이 제대로 잡혀 있는 눈을 보니 건강 그 자체였다. 나는 부러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아프지 않으면 됐어요.”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시선을 돌렸다. 귓가가 붉어지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질투했습니다.”

    항상 그렇듯 그의 말은 뜬금없고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기에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카를라 님과 위대한 분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게 질투가 났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를 질투했다는 말인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이상한 곳에서 질투했다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구나 싶어 작게 웃었다.

    “별 이야기 안 했는데. 신이 나한테만 말 걸어 줘서 질투 났어요?”

    좋은 말을 한 것도 아니라 굳이 말해 줄 필요를 못 느낀 건데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많이 서운했냐고 묻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는 한참 머뭇거리고 입술을 씹었다. 결국, 테오도르는 몇 번이나 마른세수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이 그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저도 모르게 질투했습니다.”

    나는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농담인가 싶었으나 그가 진지하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게 친밀하게 보였다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친밀하게 보일 수가 있나, 누가 봐도 살벌했을 텐데. 예전부터 했던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테오도르는 시력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등 뒤에 있어서 내 표정을 못 봤나?’

    최대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제게도 그렇게 열렬한 감정을 보여 주셨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부끄러워서 눈을 가렸습니다. 카를라 님께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 이 멀쩡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 혼자만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방금까지 테오도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던 생각을 싹 지워 버리기로 했다. 입가에 웃음이 실실 걸렸다. 테오도르가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그가 몇 마디 했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방언을 내뱉는 대신관과 시종들을 훑어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난장판에서 그런 건 부끄러울 일도 아니죠.”

    테오도르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 *

    신은 리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등의 애정 표현을 끝낸 후 사라졌다. 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그게 신이었다는 언질을 받자 깜짝 놀랐다.

    ‘신도 취향 참 이상해.’

    현실 도피도 잠깐이었다. 나는 제정신을 찾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갑자기 다른 세계에 빙의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영혼의 시간만 뒤바꾼 거라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설프게 이해가 가서 더 짜증 났다.

    ‘간단히 말해서 살아서 멀쩡히는 돌아갈 방법이 아예 없다는 거지.’

    숨을 깊게 뱉었다. 몇십 년을 여기서 더 살아야 한다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죽으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내가 카를라라고.’

    그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너는 귀족이고 한눈에 반한 백작과 결혼까지 했다고 하면 누가 당장 수긍할까. 심지어 닮은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당장 얼굴만 보더라도…….

    ‘잠깐, 내가 어떻게 생겼었지?’

    내가 어떻게 생겼더라. 내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까만 머리, 까만 눈. 그러나 다른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어땠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까지 신이 보여 줬던 이미지라도 떠올리려고 했으나 내 얼굴만 흐릿하게 지워진 것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본 것이 내 얼굴이 맞나?

    ‘엄마를 닮았어. 나는 엄마랑 비슷하게 생겼어.’

    엄마를 닮았다는 정보값만 머릿속에 떠다닐 뿐, 엄마의 외모에서 나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공황이 올 것 같아 테오도르의 팔을 꽉 쥐었다.

    “카를라 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카를라가 아니다.

    ‘내 이름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썼으나 물에 젖은 종이에서 글자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었다.

    “아…….”

    뜨거운 것이 목을 짓눌렀다. 빌어먹을. 나는 욕을 삼키며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안 나요.”

    “카를라 님.”

    “내 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종들은 바쁘게 움직이느라 나와 테오도르를 힐끔거릴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대신관과 리자를 밖으로 내보낸 왕이 내게 다가왔다.

    “백작, 무슨 문제가 있나?”

    나는 침을 삼켰다. 우선은 진정해야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떨리고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숨을 제대로 고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왕은 정리된 주변을 눈으로 훑곤 내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지.”

    “괜찮아요.”

    나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테오도르가 몸을 일으켜 나를 부축해 주었다. 다행히 팔다리에 힘이 돌아와 다시 주저앉지 않고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말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생각의 가닥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왕에게 친구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전하란 말인가. 영원히, 다시는,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러나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

    “백작.”

    “네, 폐하.”

    “그대는 휴식이 필요해 보여.”

    왕은 방을 내주겠다고 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강건하게 말했다.

    “쉬게. 이야기하는 건 그다음이야.”

    “하지만…….”

    “나는 방금 신과 독대한 친구를 괴롭힐 정도로 모진 왕이 아니야.”

    왕이 킬킬거리며 농담을 던졌지만,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폐하, 중요한 이야기예요. 지금 말씀드리지 않으면 아마 저는 계속 침묵할 겁니다.”

    나는 빠르게 말했다. 왕은 주변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응접실에 나와 왕, 그리고 테오도르만 남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신이 말하길, 제가 카를라라더군요.”

    왕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 얼굴이 신이 보여 주었던 어린 왕녀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눈물 자국은 없었으나 무섭다고 울던 어린 소녀의 얼굴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신이 리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카를라의 일기장을 이용했다는 것, 미래의 내게서 영혼과 기억만 이어 붙여 카를라의 몸에 넣었다는 것, 카를라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영혼이라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 그러나 원래의 내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혼란스럽다는 것까지.

    기억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인 탓에 나조차도 헷갈릴 이야기였으나 왕은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기억을 잃었을 뿐, 여전히 카를라라…….”

    그녀는 손가락으로 턱을 감싸고, 검지로 뺨을 톡톡 쳤다. 잠시 생각하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반응은 그게 끝이었다. 나는 간신히 힘을 짜내어 그녀에게 사과했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아 발끝에 힘을 주었다.

    “미안해요.”

    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군.”

    그녀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돌아가고 싶다면 방법이 있지 않나.”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

    “죽으면 돌아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새파란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등에 소름이 끼쳤다. 왕은 나를 죽여 버릴 생각인 걸까. 테오도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자 그녀가 웃으며 나를 보았다.

    “싫다면 계속 카를라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왕은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말을 내게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