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8화
리자는 문을 열고 카를라를 보자마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식기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차마 못 볼 꼴이라 눈을 감자,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이 들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기분에 눈을 뜨자, 이번에는 내가 보였다.
카를라가 아니라, 나.
내가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업을 듣고, 엄마와 싸우고, 화해하고, 부모님과 사진을 찍는 모습까지. 연이어 회사에서 야근하는 모습, 상사의 뒤통수에 중지를 올리는 모습, 승진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남몰래 즐거워하는 모습……. 그리고 내 기억에 없는 모습까지 보였다.
“엄마, 나 행복하게 살게. 아빠는 이 좋은 날에 울긴 왜 울어.”
난 결혼한 적도 없는데 결혼식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를 않나, 아이를 낳는 장면도 보였다. 심지어 애는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 남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화목한 가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지?’
당황하기도 전에 장면은 빠르게 지나가 내가 늙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미래의 모습 같기는 한데.’
내가 카를라에게 빙의하지 않았으면 펼쳐졌을 미래의 모습 같았다. 마지막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린다는 암에 걸려 앓는 모습이었다. 중년의 딸이 내 손을 잡고 우는 모습, 아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연달아 비쳤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눈을 감고 사망 선고를 받자, 신이 내 가슴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영혼?’
영혼이라고 하면 특별하게 보일 줄 알았는데, 그냥 종이 뭉치였다. 책이라고 하기엔 엉성하게 접혀 있는 모양이 서류 뭉치같이 보였다. 신은 그것을 꺼내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허공에서 다른 종이 뭉치를 꺼내 합치기 시작했다.
종이가 넘어가듯 화면이 넘어가서, 다시, 내가 카를라의 몸에서 깨어났다. 몸이 마구 흔들렸다. 나는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테오도르가 나를 끌어안고 있던 모양이었다. 쓰러진 지 몇 초도 되지 않았는지, 주변은 바뀐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신이 말했다.
“시간을 꼬아 놨을 뿐, 당신은 카를라예요. 같은 영혼이거든요.”
얄미운 소리를 늘어놓는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카를라라니. 빙의가 아니라 환생이라는 소리였다. 아니,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신이 개입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요.”
황금을 꼬아 만든 것 같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지금은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영혼이니 시간을 꼬았니,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잘 살던 나를 여기로 옮겨 온 건 신이 맞았다. 그것도 남의 기억 잘라다가 멋대로 이어 붙여 놓고선 뻔뻔하게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라니.
‘이게 게임도 아니고. 양심이 있으면 미안한 척이라도 해라.’
나는 짜증스럽게 신에게 뱉었다.
“그래, 카를라가 원해서 나를 여기에 넣었다는 건 이해하겠어. 하지만, 카를라가 원한 게 정말 이런 모습이었을까?”
“아닌데요?”
“뭐?”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이 리자와 똑같았다.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까지 완벽히 리자였다. 다만 더 얄밉고 짜증 났다. 리자는 머리가 꽃밭이기는 해도 악의가 없는데, 신은 제가 의도해 놓고 아닌 척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얄밉고 재수 없었다.
“내 귀여운 창조물은 그저 당신이 죽지 않기를 바랐어요. 정말 욕심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카를라가…….”
“아뇨.”
신은 고개를 저었다. 카를라가 원한 게 아니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리자가 원한 거랍니다.”
“카를라의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라고?”
신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늘 해맑은 미소만 짓던 얼굴이 비웃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당신의 소원도 들어줬어요.”
“똑바로 말해.”
신은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가여운 내 창조물이 처음으로 간절하게 바란 게 고작 연적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거라니, 들어줄 수밖에 없잖아요.”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은 내가 입을 벌리고 있든 말든 계속 말을 이었다.
“너무 귀엽지 않나요? 그래서 당신의 일기장을 매개체로 해서 소원을 이루어 줬어요. 다른 삶을 살던 영혼을 집어넣으면 죽을 생각을 하지 않겠죠. 복수도 하고 싶어질 테고요. 당신의 소원도 이뤄지고, 내 피조물의 소원도 이뤄지고.”
나는 확신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요. 죽으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까.”
이 세계는 신도 미쳤어.
* * *
이 정도면 이 세상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모두 리자를 위해 신이 깔아 놓은 판이라니. 허탈하다기보다 그냥 웃겼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웃는 것을 보던 대신관이 왕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위대한 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전혀 모르겠군.”
두 사람은 나와 신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시종들은 분위기를 살피며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마침내 대신관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위대한 분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나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에게 네가 믿는 신이 미쳤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여기도 화형이 있을까?’
자칫하면 마녀로 몰려 불에 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한숨을 쉬자 대신관은 기겁하며 내게 달라붙었다.
“큰일입니까?”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신이 미쳐서 사람 인생 하나 꼬았다고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어차피 너도 들은 걸 뭐 하러 내게 묻냐는 식으로 묻자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감히 인간이 위대한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신을 노려보았으나 리자를 닮은 얼굴은 화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진짜 얄밉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들리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물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신도 있고 영혼도 꺼냈다가 집어넣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을까. 허공에서 갑자기 개구리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해해야 할 판이었다.
대신관이 무릎을 꿇었다. 계속 말을 해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앞뒤 말을 다 자르고 적당히 뱉었다.
“신께서 아끼는 창조물이 있다고 하십니다.”
대신관의 눈이 커졌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아무렇게나 말을 뱉었다. 사실 신이 당황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제 전담 하녀입니다.”
“오오…….”
대신관이 감탄했다. 그는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청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 가까이에 있는 시종을 불러 귓속말했다. 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방긋방긋 웃으며 종이 위에서 몸을 흔들거릴 뿐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리자와 닮은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일단 주변 사람들 시선은 돌려놨고.’
나는 다시 신에게 말했다.
“돌려놔.”
“뭘요?”
신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정말 리자와 똑 닮아서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돌려놓을 게 없는데요.”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기운이 없어서 눈을 뜨고 입을 여는 것도 겨우겨우 하는 수준이었다.
“내 기억을 싹 지우고 카를라의 기억을 다시 욱여넣든가, 아니면 없던 일로 하던가. 할 수 있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해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 얄미웠다.
“어차피 당신은 카를라고, 카를라가 당신이에요. 시간을 조금 섞어 놓기는 했지만, 어차피 영혼은 똑같은데 뭐가 문제인가요?”
아니다. 나는 카를라가 아니었고, 카를라 또한 내가 아니었다. 살아온 삶이 다르고 기억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를 악물자 신이 눈을 깜빡였다.
“정말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신은 내게 힘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지금 힘이 있었으면 험한 꼴을 봤을 테니까.
“콜록…….”
기침이 터져 몸을 웅크리자, 테오도르가 등을 쓸어 주었다. 나는 그를 보며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은 진정제 효과를 톡톡히 했다.
‘이 얼굴 보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점점 숨을 고를수록 신의 개소리에 내가 설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미치겠네.’
숨을 길게 내쉬며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동안, 시종이 리자를 데려왔다.
“마님?”
그녀는 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나를 보곤 깜짝 놀라 다가왔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맞으신 거예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치 없이 뱉는 말에 화가 나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착각을 정정해 줄 기력이 없어 신을 바라보자, 리자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감탄처럼 뱉었다.
“와아……. 예쁘다.”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보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뻔뻔함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제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백의 지능에 놀라야 할지 몰랐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나는 대신관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