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7화
신에게는 후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위엄이나 위압감도 없었다. 그러나 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은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것 같지 않은 위화감이 들었다.
머리카락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흰 피부는 우유를 빚어 만든 것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신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신관과 왕, 그리고 시종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관은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몸을 휘청였는데,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 테오도르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뒤를 돌아보는 순간 눈앞의 존재가 사라질 것 같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신이 다시 물었다.
“정말 진실을 알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 끝이 내 이마를 부드럽게 스쳤다. 신의 손가락은 차가운 물과 똑같은 감촉이었다.
‘어?’
신이 손가락을 떼어내자마자 물 위에 먹물이 쏟아지듯 기억이 나를 침식했다. 몸이 멋대로 휘청거리고 몸과 혼이 분리되는 듯한 오싹한 감각에서 겨우 헤어 나오자, 이번에는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아니, 그건 글자라기보다 영상 위에 덧씌운 해설 같은 것이었다.
‘카를라는 줄곧 의아하게 생각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카를라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아름답군, 소공작.”
“저하께서는 여전히 다소곳한 왕녀님이세요.”
당시엔 3왕녀로 불렸던 어린 왕이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여럿 달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그녀를 짓누를 것처럼 보였다.
“오늘 치장을 도운 시종은 손목을 자르셔야겠어요.”
카를라는 시종들을 훑어보며 웃었다. 시종들이 바짝 얼어붙어 그녀의 눈치를 살피자, 왕녀는 자그마한 손을 내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가 다시 해 줘. 그러려고 온 게 아닌가.”
“네, 그럼요.”
카를라는 곧장 그녀의 머리카락에 걸린 수많은 장신구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신구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고, 시종들은 그것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머리 장신구는 간단한 것으로 바꾸고, 목걸이는 푸른 계열이 좋겠어요.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하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나?”
“그렇네요. 아둔한 왕녀님처럼 보이세요. 방긋방긋 웃으시면 더 좋을 텐데.”
“그거야 쉽지.”
둘은 가볍게 킥킥거렸다. 카를라가 왕녀의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하자 다시 내레이션이 들렸다.
‘욕심도 재주도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러니 하찮은 것들까지 당신을 얕잡아 보잖아.’
페이지를 얼기설기 잘라 낸 것처럼 단편적인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먼 나라로 시집가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흘리는 어린 소녀를 카를라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흰 뺨에 선명하게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며 그녀가 말했다.
“전하, 시집가지 않으셔도 되는 방법이 있잖아요.”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나.”
“죽으면 타국으로 가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왕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으시다면 왕이 되시면 됩니다. 아무도 전하에게 명령하지 못하도록 왕관을 쓰세요, 전하.”
새카만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호한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카를라는 눈앞의 왕녀가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넌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
새하얗게 질리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깜빡이던 눈은 이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카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왕녀가, 아니 어린 시절의 왕이 카를라의 손을 잡았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 왕위 쟁탈은 없다. 왕위를 경쟁하던 두 왕자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하찮게 여겼으나, 그녀가 새로운 경쟁자로 나타나자마자 공격적으로 몰아붙였다. 왕녀는 두 명의 시녀를 멀리 떠나보내야 했고, 수십 명의 시종을 잃었다.
왕녀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두 경쟁자의 얕은 신앙심을 폭로하고, 자신의 유능함을 드러냈다. 그녀는 카를라를 뒤에 세우고 왕에게 당당히 말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저를 타국에 보내시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마침내 왕녀는 자신의 정적인 두 왕자를 신전으로 유배 보내고, 왕세자가 되었다.
왕관에 박힌 보석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르자 카를라의 환희가 온몸에 퍼졌다. 뇌가 저릿해질 정도의 쾌감이었다.
‘성공의 기억은 짜릿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준다. 그것이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도 자신만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화면은 흐물흐물하게 녹아 사라지고 공간은 다른 풍경으로 가득 찼다. 무도회장이었다. 카를라는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고, 왕의 옆에 서서 주변 사람들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카를라와 백작의 눈이 맞았다. 백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어 보였고, 카를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카를라는 자만에 젖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벽에 손을 짚은 카를라를 부축하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두 사람이 샴페인을 나누어 마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진실과 거짓을 명확히 구분해 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카를라가 백작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정해지고, 그와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속이 매스꺼워지려고 하기 전에 다른 장면이 떠올렸다.
‘사랑이 눈을 가린 게 아니라 사랑을 핑계로 눈을 감은 것이다.’
백작이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이나 카를라에게 주었던 편지들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쓴 연서가 섞여 있던 모습이 보였다.
글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글자는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문장이었다. 백작이 카를라에게 주었던 유치한 편지에 쓰여 있던 글이었다.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전부 거짓이었어.’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건 카를라의 목소리였다. 내 말투와는 전혀 달라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걸 내게 왜 보여 주는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만 알려 주면 되는데.’
속으로 투덜거리자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싸우는 카를라, 가족과 연을 끊겠다고 선언하는 카를라, 백작과 결혼하는 카를라, 그와 싸우는 카를라, 몰래 눈물을 훔치는 카를라, 백작의 바람을 알게 된 카를라의 모습이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를라는 공책을 펼쳤다. 침대 밑 깨진 대리석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 공책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훑어봤던 일기장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흰 종이 위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일들이 날카로운 글자로 변해 갔다.
[그도 언젠가 나를 사랑해 줄까?]
카를라는 펜을 쥐고 기도했다. 그가 자신을 돌아봐 주길,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갉아먹으며 버텨 왔다.
[차라리 내가 그를 증오했다면, 그의 피로 내 손과 칼을 적실 수 있었다면! 내게는 그의 부도덕을 고발할 혀도, 그를 찌를 손도 없다.]
펜촉 흔적이 남을 정도로 꾹꾹 눌러 쓴 글씨 위로 눈물 자국이 번졌다. 불빛에 비친 글씨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거였어?’
내 추측이 맞았다. 신이 말했던 그녀는 카를라였고, 그녀가 백작을 싫어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나야?’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장면을 보여 주었다. 카를라가 마차를 타고 외출하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꽤 낯익다고 생각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현기증이 나서 그래. 오늘은 몸 상태가 영 좋지 않구나. 돌아가야겠다. 살 것을 적어 줄 테니 내일 다녀오렴.”
“네.”
카를라는 벨의 부축을 받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휘청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굽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낯익은 광경이 나와 카를라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의 침대 위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백작과 리자가 보였다.
‘내가 빙의하지 않았으면 벌어질 일을 보여 주는 건가?’
카를라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벨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카를라의 새카만 눈은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여자를 보고 백작은 당황한 듯 머뭇거렸으나, 이내 옷을 챙겨 입고 리자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때보다 더 미쳤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카를라의 어깨를 잡아 위로하려 했으나, 내 손은 뿌연 안개처럼 변해 흩어질 뿐이었다.
카를라는 천천히 일어나 벨에게 명령했다.
“내일 심부름은 가지 않아도 된단다. 쉬고 싶으니 부르기 전까지 들어오지 마. 그리고 내일 아침은 방에서 먹을게. 아까 그 하녀에게 들려 보내렴.”
“마님…….”
“대답하렴.”
“네, 마님.”
카를라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찢은 천이 목에 감겼다. 나는 그녀를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그녀에게 닿기는커녕 방을 나설 수조차 없었다. 저물어 가는 노을이 창백한 카를라의 뺨을 붉게 물들였다.
다음 날 아침, 리자가 문을 열 때까지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