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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6)화 (9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6화

    “사흘이면 충분하겠군.”

    “사흘이요?”

    담담한 왕과 달리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얕다지만, 대신관을 사흘 만에 불러내는 게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인지는 알았다.

    “너무 촉박한가?”

    “아뇨, 아닙니다.”

    의아한 표정의 왕에게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약속을 잡았다. 사흘 뒤, 집에 돌아갈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밀한 이야기가 끝나자 왕은 다시 시종들을 불러들였다. 테오도르 또한 시종들과 함께 들어와 내 뒤에 자리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었는데, 그 모습이 충실한 강아지 같아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고 말했다간 그가 부끄러워할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주변을 훑어보더니, 시종들의 눈을 피해 내게 속삭였다.

    “쓰다듬어 주시는 줄 알고 기대했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말을 배워 왔을까.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귓가는 빨간 주제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익숙지 않은 말을 하느라 노력한 모양이었다.

    ‘귀여워 죽겠네.’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이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털어냈다.

    “먼지가 묻었어요, 테오도르 경.”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상체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표정 관리에 애를 먹는 사람이 아니니, 저건 일부러 내게 보여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럼 사흘 후에 보지.”

    “네, 폐하.”

    * * *

    ‘나라의 존망을 위해 위대한 분의 지혜를 빌리고자 하니, 대신관은 사흘 내로 왕실을 방문해 주길 바라오.’

    대신관은 왕실의 무례한 요청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왕은 거액의 기부금을 미끼로 대신관을 불렀다. 다른 사람을 불렀다면 신전에서도 기꺼이 응했겠지만, 대신관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장을 오가는 건 어린 사제들이나 할 일이었다.

    ‘왕실의 건방짐을 어디까지 묵인해야 하나.’

    그는 이를 갈면서도 답장을 위해 종이를 꺼내 들었다. 지금의 왕은 유일하게 신전에 힘을 실어 주는 인물이었다. 그녀와 왕위를 놓고 다투던 왕자들이 신전을 탄압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런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신전을 쑤셔 댈 것이 뻔했다.

    그녀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얌전한 왕녀인 척하더니 갑자기 왕권에 욕심내지를 않나, 한바탕 싸우고 헤어진 시녀와 다시 친해지지를 않나, 카지노 따위를 만들어 사람들을 홀려 놓기까지 했다.

    그동안 왕이 벌여 온 기행을 떠올리며 대신관은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동작 하나하나에 경건함이 묻어 나왔으나 머릿속은 영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능구렁이 같은 여자야.’

    거기다가 제 능력을 얼마나 감쪽같이 속이는지, 어린 왕녀가 미지의 대륙을 방문하겠다는 탐험가에게 투자할 때는 대신관조차도 비웃지 않았던가.

    선대 왕에게 선박 권리서를 받아 낼 때는 어린 왕녀가 생각이 짧다며 야유를 받았으나, 지금은 다르다. 황실에는 황금이 넘쳐난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다. 귀족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줄 알았는데, 집권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오히려 역으로 귀족들을 제 발밑에 무릎 꿇린 여자였다. 척을 져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대신관은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자존심을 세우기엔 너무나 많은 액수의 기부금이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해하소서.’

    장서를 보관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 법이었다.

    * * *

    왕의 말대로 정확히 사흘 후, 나는 대신관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백발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노인은 걷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흰옷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그가 느릿느릿 허리를 숙였다.

    “실로 오랜만이오, 대신관.”

    “폐하, 이 늙은이를 찾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대신관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몸을 휘청거렸다. 안타까워 부축하려 하자, 테오도르가 한쪽 팔로 나를 막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귓가에 속삭였다.

    “일부러 저러시는 겁니다.”

    “일부러요?”

    그의 숨이 닿은 귓바퀴가 간지러웠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신경전을 벌이는 겁니다. 신전은 왕실에 우호적이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좀…….”

    흐린 뒷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이 대신관을 부르기 위해 억지를 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대신관의 체면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었으니까.

    왕은 적당히 체면을 차렸다 싶었는지 인사가 끝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위대한 분의 지혜를 빌리고 싶소.”

    “최대한 책이 많으면서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좋소. 따라오게.”

    왕은 미리 준비해 둔 공간으로 향했다. 그 뒤를 대신관이 따랐다. 나는 시종들 사이에 섞여 그들을 쫓았다. 왕이 안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다만, 이전과는 구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큼지막한 창은 두꺼운 커튼으로 막아 놓고, 양쪽 벽은 책장으로 꽉 매워져 벽지의 색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여전했지만, 차를 마시기 좋게 만들어 놓은 탁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넓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이곳이 응접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뀌지 않은 묵직한 문과 바닥의 무늬뿐이었다.

    “이 정도면 어떤가.”

    “훌륭합니다.”

    대신관은 챙겨 온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러곤 황금색 잉크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획을 그려 나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응접실에는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가득 찼다. 마침내 종이 가장자리가 황금색 글자로 가득 차자,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대신관의 목이며 턱 밑으로는 땀이 흥건했다. 종이 위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게 용하다 싶었다. 시종들이 젖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 주었다.

    “위대한 분의 글자가 내려올지 아닐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럼 몇 장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왕은 신이 대답할 때까지 대신관을 쥐어짜겠다는 소리를 거침없이 뱉었다. 노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늙은이의 능력을 과하게 보십니다.”

    “그럼 답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빌어 주시게나.”

    왕이 내게 턱짓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펜을 들었다. 대신관이 내민 종이 위에 잉크가 스며들어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사흘 내도록 고민했다. 어떤 질문을 해야 좋을지. 그러나 카를라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이전과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펜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과 동그라미가 글자를 만들어 냈다.

    ‘진실을 알려 줘.’

    카를라의 일기장을 읽어서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면 나를 돌려보내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나를 돌려보내지 않는 이유가 뭔지, 왜 카를라의 몸에 나를 집어넣은 건지 듣고 싶었다.

    내가 마침표를 찍자,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던 금색 잉크가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왕과 대신관의 앞이라 큰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속삭이는 소리가 뭉쳐 울렁거렸다. 왕도 놀란 듯 책상에 몸을 바짝 붙였다. 오로지 나만 덤덤하게 종이를 노려보았다.

    종이 위에 새겨지듯 글자가 떠올랐다. 한글이 아니었다. 카를라의 필체를 흉내 낸 이 세계의 글자였다.

    ‘그대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건 대답도 뭣도 아니었다. 대신관이 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폐하, 축하드립니다.”

    그는 신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려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연신 감탄을 뱉었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는 사라지려고 하는 글자를 바라보며 품에 넣어 둔 병을 꺼냈다. 예전에 리자에게 건네주었던 화장품 통이었다. 집무실 구석을 뒹굴고 있던 것을 다시 주웠는데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펜으로 통 안에 든 액체를 찍어 종이 위에 글을 휘갈겨 썼다. 액체가 제대로 묻지 않아 엉망으로 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네 지금 뭘 하는 건가!”

    “놔두게.”

    대신관이 소리치자 왕이 말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협박하려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일단 밀어붙이는 게 중요했다. 글자가 사라지던 현상이 멈추고, 이번에는 종이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자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는 여주인공을 죽여 버리겠어.’

    대신관을 만나기 전, 혹시나 해 리자의 손가락에서 피를 몇 방울 받아 놓은 게 정말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신을 상대로 협박이 먹힐까 싶었지만, 아주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와 샹들리에를 흔들고 벽에 붙은 촛불을 모두 꺼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자, 종이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내가 잘 아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에메랄드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이 세계의 주인공.

    “정말 진실을 알고 싶나요?”

    신은 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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