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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5)화 (9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5화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며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해.”

차가운 목소리에 목덜미가 쭈뼛 섰다. 왕은 나를 보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찻잔 손잡이를 만지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남은 찻물을 내게 끼얹을 것 같아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 태도를 싫어하지는 않아.”

왕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디가 그녀의 심기를 거슬렸을지 몰라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가 돌아가고 나면, 그 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진짜 카를라가 돌아오지 않을까요?”

“카를라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없나? 다른 사람이 그 몸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왕의 질문에서 그녀의 두려움을 읽어냈다.

“저는 폐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백작이 사라지면 내가 곤란해져.”

“…….”

그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 왕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우울하게 말했다.

“친구를 두 번 잃고 싶지는 않아.”

왕은 아직도 내게서 카를라를 찾고 있었다. 혹시 머리가 다친 건 아닐까, 기적처럼 친구가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 앞에서 난 네 친구가 아니라고 다시 한번 못 박았으니 속상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부러 카를라에게 빙의한 것도 아닌데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신 때문인데.’

그러나 왕을 설득해야 내가 돌아갈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커졌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아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거짓말을 했다간 후에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머리싸움으로 왕을 이기려고 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카를라와 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폐하뿐이에요.”

나는 그녀의 감성에 호소하기로 했다.

“다시 친구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검지가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톡. 일정한 리듬을 갖춘 소리가 영원히 들릴 것처럼 나를 옭아매었다. 소리가 마흔 번 들린 후에야 왕의 손가락이 멈추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카를라가 신에게 뭘 빌었는지를 찾아야 해요. 그녀와 주고받은 서신을 볼 수 있을까요?”

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성기사를 내보낸 이유가 있었군. 확실히 신전에서 알면 시끄러워질 일이야.”

이미 테오도르에게는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은 상태였으나, 왕에게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돌아가려는 추한 발버둥을 그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왕은 나를 흘겨보더니 종을 흔들어 시종을 불렀다.

“백작과 주고받았던 서신을 모두 가져오게.”

“예, 폐하.”

왕은 카를라가 보낸 편지를 대부분 보관하고 있었다. 아니,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라고 해야 좋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까지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걸 보관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위험한 이야기는 모두 말로 했으니 태울 필요가 없거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편지를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는데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왕이 덧붙였다.

“카를라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야. 편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지.”

그러면서도 종이 꾸러미를 어루만지는 손은 정중하고 애틋했다. 나는 도무지 왕에게 카를라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왕은 내게 종이 꾸러미를 건넸다. 묵직한 종이 뭉치는 총 다섯 개로, 테이블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나는 그것들을 뒤적이다가 꾸러미 하나를 슬쩍 옆으로 빼냈다.

“어릴 때 쓴 편지는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혹시 모르잖나.”

왕이 다시 꾸러미를 밀어 주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투덜거렸다가 도움을 받지 못하면 나만 손해였다. 다행히 어린 시절 주고받은 편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편지에는 특이할 것이 없었다. 모임이 기대된다거나, 승마 연습을 하자거나, 추천받은 책이 재미있었다는 내용 따위였다. 나는 종이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비밀 암호 같은 건…….”

“없어.”

왕은 혀를 차며 나머지 꾸러미를 끌러 주었다. 시종을 시키지 않고 편지를 직접 내주면서도 별 미련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편지 속의 카를라는 후계 수업이 지루하다고 투덜거리기는 하였으나 공작이 되기 싫다는 뉘앙스는 전혀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소공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를라는 공작이 되고 싶지 않았대요.”

“누가 그러던가?”

“유모에게 들었어요.”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공작저의 서재를 온통 뒤집어엎었는데도 별다른 게 보이지 않길래 혹시나 해 물어봤더니 대답해 주더군요. 예전에 카를라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요.”

왕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작과 소공작도 그대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나?”

“아뇨. 모르고 있어요.”

“다행이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은 그렇게 보여도 광신도거든. 딸의 몸을 차지한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그녀는 농담처럼 던졌으나, 곧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딸이 아니라면 부모의 눈이 뒤집힐 것이야 뻔한 일이었다. 내가 정말 악귀든 악귀가 아니든 그들의 눈에는 딸의 몸을 차지한 나쁜 놈일 것이다.

“주의하겠습니다.”

마저 편지를 훑어보았지만, 단서가 될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작의 저택도, 왕에게 보낸 편지도 아니라면 어디에 쓴 글일까. 머리를 짚고 뭘 놓쳤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카를라가 원했기 때문에 그대가 여기에 온 거라고 했지.”

왕이 편지 뭉치를 다시 묶으며 말했다. 허탕을 쳤는데도 그녀는 꽤 태연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라더군요.”

“정확히 뭘 원했는지는 그대도 모른다는 거군. 그대가 카를라의 몸을 차지한 건, 그저 결과일 뿐이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는지 내게 다시 물었다.

“일기장은?”

“제일 먼저 확인했지만, 신에게 뭔가를 비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어요.”

백작을 죽이고 싶다는 문장이 있었으나 나는 짐짓 입을 다물었다. 카를라가 신에게 빌었기 때문에 백작이 죽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 쓰임새가 고작 백작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백작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죽은 것이다. 왕은 굳이 일기장을 확인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누구에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겠냐는 뜻이었다.

“이 세계의 신은 그렇게 친절한 것 같지 않던데요.”

나도 해 봤다는 뜻으로 툴툴거리자 왕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테이블을 다시 톡, 치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신에게 대답을 어떻게 받았지?”

“테오도르 경이 사제에게 무슨 종이를 받아 줬어요. 금색 글자가 테두리에 적혀 있는 종이였는데, 거기에 글을 썼더니 글자가 떠올랐어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사제들이 쓰는 종이를 받은 모양이로군.”

그녀는 하급 사제들이 쓰는 종이라 신의 대답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원래 하급 사제들이 신의 대답을 듣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럼 더 높은 신관들이 쓰는 종이는 대답을 더 자세히 해 주나요?”

“그렇겠지.”

왕은 확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써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나는 편지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신전에서 쓰는 종이를 어떻게 구할지 막막했다. 몰래 숨어들어서 훔치는 건 어떨까, 테오도르라면 종이를 쌓아 놓는 곳을 알지도 모른다.

“신전에 잠입하다가 걸리면 크게 문제가 되겠죠?”

심각한 얼굴로 묻자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잠입은 무슨. 그대는 내가 누군지 잊었나?”

그녀는 어깨를 펴고 입가를 끌어올렸다.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형제들을 모두 신전으로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여자가 호기롭게 말했다.

“대신관을 왕궁에 초대하면 돼. 적당히 둘러대고 기부금을 쥐여 주면 좋아서 쫓아올걸세. 카를라는 내 시녀였으니, 대필을 시켰다고 하면 의심하지 않겠지.”

그녀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이게 권력의 힘이구나. 대신관 정도는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다는 말에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신에게 질문하는 모습을 보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왕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나이 먹도록 암호 하나 쓸 줄 모르나?”

아, 그렇지. 한국어가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나.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쉽게 풀리면 좋은 거지.’

집에 돌아갈 실마리를 얻었는데도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나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언제쯤 대신관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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