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4화
‘왕실에서 일했던 사람이 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왕실에서 일했다면 일 할 곳은 넘쳐났다. 얼마 전 주인이 죽어 어수선한 저택이 아닌, 내정이 건실한 귀족가가 얼마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추천장을 위조한 게 아닐까 싶어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물어보지.”
“네.”
“이 저택에서 뭘 하고 싶은 건가?”
신입 사원에게 늘 묻는 ‘기업에 입사하게 되면 어떻게 활약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집사가 되고 싶습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왕실의 견습 집사로 10년을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좋지 않아 정식 집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분을 보지 않는 곳은 백작님의 저택이 유일해서 찾아왔습니다.”
아하. 그제야 나는 그가 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승진 안 되는 직장에 충성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돈만 보고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동기와 후배들이 승진하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이라면 누구라도 회의감이 들 것이다.
‘그래도 시기가 너무 잘 맞물리는데.’
왕에게 집사를 찾은 후에 방문하겠다고 언질을 주자마자 찾아온 사람이라니, 시기가 잘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거기다가 출신이 좋지 않다는 말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쓱싹해 버리기 좋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앞뒤가 너무 잘 맞는 것도 의심스러워 그를 싸늘하게 훑어보자, 그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전령이 귀띔해 줬습니다. 백작님의 저택에는 지금 집사 자리가 비어 있다고요.”
나는 혀를 찼다. 역시나 왕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전령이 업무에 관련된 일을 멋대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왕이 시킨 일이 분명했다.
‘진짜 취향 이상하다니까.’
왕은 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도움도 에둘러 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집사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남자는 꽤 정직해 보였고, 사람을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왕실의 추천장을 가진 사람을 쉽게 내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반입니다!”
“당분간은 내 전담 하녀인 벨이 그대를 가르칠걸세. 미리 말해 두지만 내 하녀보다 유능하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거야. 계약서는 일주일 뒤에 쓰지.”
“감사합니다!”
남자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벨, 저택 업무를 가르치렴. 카지노의 일은 여전히 네가 맡고.”
“네, 주인님.”
벨이 새로운 집사를 데려간 후, 나는 곧장 왕에게 편지를 썼다. 뭐라고 써야 왕이 좋아할까를 생각하느라, 테오도르가 집사를 노려보는 이유를 묻는다는 걸 까맣게 잊고 말았다.
* * *
편지를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왕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벨은 신나게 드레스와 장신구를 늘어놓았다. 백작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간도 끝났겠다, 실컷 꾸밀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드레스가 짙은 감색이니 보석은 더 밝아도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눈을 빛내며 내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핀을 찔러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새로운 집사가 일을 잘 배워 조만간 업무에서 손을 떼어도 되겠다며 흥얼거리는 모습이 측은하기까지 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벨은 너무 신난 나머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거울 속의 카를라는 음울해 보였던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이 세계에서 미인이라고 쳐주지는 않는 외형이었다.
“아름다운 건 모르겠지만, 엄청 예뻐요, 마님!”
그러나 리자까지 예쁘다고 추켜세우자 어깨가 으쓱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좀 예쁜 것 같기도 해,’
이런 오만한 생각은 왕을 만나자마자 단숨에 사라졌다.
“여전히 아름답군, 백작.”
왕이 얼굴을 보자마자 비아냥거렸기 때문이었다. 카를라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저러고 싶을까 싶어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방긋 웃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검소하시고요.”
우리 사이에 놓인 값비싼 찻잔과 호화로운 디저트를 보며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왕이 최근 유행하는 연극이나 소설에 대해 말해 주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 사교계의 끝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끝나자 왕은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응접실에는 나와 왕, 그리고 테오도르만이 남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왕이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주어가 없어도 누구를 뜻하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와인에 독을 타서 저를 죽이려다가 잔을 헷갈렸는지 자신이 마시더군요.”
“그럴 리가. 솔직히 말해 봐. 어떻게 한 거야?”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알고 싶으세요?”
왕이 내 눈을 보는 순간, 왕의 찻잔과 내 것을 바꿔치기했다. 와인 잔보다는 어려웠지만,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바꿀 수 있었다.
“이렇게요.”
“이런 뻔한 수에 그가 속았다고?”
“네.”
내가 다시 찻잔을 돌려주자, 그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진짜 멍청하고 바보 같군!”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왕은 즐겁게 차를 마셨다. 내가 잔에 무슨 짓을 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즐겁다는 듯 흥얼거리며 스콘에 잼을 발라 베어 물었다. 나 또한 다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쓸 만하던가?”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
왕이 내 뒤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복수는 끝났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라의 지참금을 되찾고, 가족과도 화해했다. 거기다 백작을 죽이고 영지와 작위를 빼앗았으니 복수도 이만한 복수가 없었다.
왕이 눈을 휘어 웃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곱게 접혀 사르르 웃음을 뿌렸다. 그러나 그녀의 혀 위에 올려진 말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테오도르와 좋은 사이가 된 것 같군.”
덜컹 심장이 가라앉았다. 피가 식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와 마음이 통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가 무서웠다. 사람이라도 붙여 놓은 것일까, 아니라면 저택의 누구와 내통하고 있나? 눈을 굴리자 왕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사람이라도 붙여 놨을 것 같은가? 뭣 하러 그런 수고를 들이지?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허공을 젓는 손이 무서웠다.
“괜찮아, 연애하는 것 정도는.”
그녀는 느긋하게 나이프로 잼을 떠 차에 섞기 시작했다. 새빨간 딸기 잼이 찻잔에 얼룩졌다.
“나는 그대를 퍽 아끼고 있어. 카를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만났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할 만큼.”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왕은 나를 견제하고 있었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잠시 손을 잡기는 했으나 친구의 몸을 차지한 정체 모를 사람을 완전히 믿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왕에게 부탁했다.
“테오도르 경까지 자리를 비운, 완전한 독대를 요청합니다.”
그녀는 흔쾌히 테오도르에게 명령했다.
“테오도르, 나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강경하게 버텼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폐하를 해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내 힘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나 개 한 마리도 해치기 어려웠다. 카를라의 몸이 워낙 연약한 탓이었다. 내 말에 왕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그대를 걱정하는 모양이지.”
“테오도르 경,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제야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켰다. 왕은 혀를 찼다.
“신전에서 영 쓸모없는 기사를 보냈군.”
그녀는 잠시 투덜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기사를 물리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는 숨을 골랐다.
“얼마 전, 신전에 방문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신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왕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신의 답변을 직접 받았나?”
“네, 제가 글을 확인하자마자 사라지더군요. 모든 질문에 대답을 받은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건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라더군요.”
“그녀라면.”
“아마 카를라겠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으나 교묘하게 말을 꼬아 사실을 숨겼다. 지금으로선 카를라가 원해서 내가 이곳에 온 게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카를라가 빈 소원이 뭔지 알 수만 있으면,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왕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나보다 더 카를라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카를라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못하든, 나는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신이 나를 이곳에 집어넣었다면, 돌아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일 테지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무적의 조커가 눈앞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빛나는 왕관을 쓴 여인에게 한숨처럼 애원했다.
“도와주세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