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3화
“저를 보자마자 카를라 님은 유부녀라고 외치셨죠.”
“그건…….”
부끄러운 기억이 헤집어져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 와서 테오도르가 다른 기사들처럼 불륜 상대를 찾으러 온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혹시 그때 일을 따지려나 싶어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배려가 기뻤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배려라니, 내 몸에 손을 댈까 봐 유부녀라고 소리를 지른 게 배려라면 때리는 건 극진한 대우냐고 묻고 싶었다.
“테오도르 경, 뭔가 착각을 하신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카를라 님이 제게 처음 하신 말씀인데, 잊을 수야 있나요.”
테오도르가 짓궂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꼭 장난을 치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모습에 발을 밟아 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 때문에 카를라 님을 좋아하게 된 거니까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테오도르의 말은 항상 뜬금없는 데가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승마장은 부인들과 밀회를 즐기려는 기사들이 많은 곳이라, 저를 오해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카를라 님은 무례한 기사에게 화내는 대신 먼저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의향을 전하는 모습이 다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카를라 님께…….”
“자, 잠깐만요.”
나는 황급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건 정말 나를 건들지 말라는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테오도르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테오도르 경을 배려할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예, 그게 제 착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다정하게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카를라 님은 이 세계의 분이 아니니, 감히 이곳의 규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의 목소리는 경건했고, 표정은 흡사 기도문이라도 읊는 것처럼 진지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에 목소리가 떨렸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요.”
“믿어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카를라 님을 마음에 품게 된 계기가 무엇이든, 이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 알아주신다면.”
테오도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예, 예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테오도르를 조금 골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청개구리였는지, 그만 보면 간혹 이런 못된 생각이 불쑥 들곤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네, 카를라 님은 아름다우십니다. 폐하와 독대하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 사용인에게도 부드러운 목소리, 다른 세계에서 왔음에도 위화감 없이 완벽하게 적응하는 모습….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카를라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줄줄 장점을 늘어놓으니 가슴이 술렁거려 제대로 그를 볼 수 없었다.
“테오도르 경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제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 기쁩니다.”
“저는 부끄러워요.”
테오도르가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보다가 나는 그의 얼굴만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가 내게 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잘생겨서라고 대답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테오도르는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봐줬는데 정작 나는 얼굴을 제일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망신이야.’
내 속을 모르는 테오도르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가볍게 기울였다. 나는 애써 웃으며 벨과 리자, 마부가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축제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일상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류를 정리하고, 점심을 먹은 후엔 카지노에 들러 장부를 정산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또 서류가 쌓여 있었다.
‘얼른 집사를 구해야겠어.’
벨이 도와주고 있지만, 전담 하녀의 일과 저택의 일을 동시에 하느라 눈 밑이 퀭한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마님, 초대장은 어디에 올려놓을까요?”
리자가 집무실 문을 빼꼼 열고 물었다. 내가 펜으로 탁자 위를 가리키자 그녀는 쪼르르 들어와 초대장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또 한세월 걸리겠네.’
리자는 이전보다 능숙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느리고 덜렁거렸다. 가끔 멍하게 어딘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핀잔을 주려다가도 멈칫하게 되었다.
“아! 맞아! 마님, 왕궁에서 전령이 왔어요!”
“지금?”
“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서류를 정리하다 그대로 굳은 벨을 보며 명령했다.
“벨, 전령을 응접실로 모시고, 차를 내드려. 급한 일이 생겨 바로 응대하지 못했다고 전해.”
“네.”
다급하게 나가는 벨을 보고서도 리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나중에 벨이 가르치겠지.’
한숨을 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더 빠르군.’
지금 이 시기에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백작이 죽어 내가 작위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작위는 자식에게 계승되어야 했지만, 카를라와 백작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귀족들은 작위를 몇 개씩 가지는 경우가 많아 배우자의 작위가 몇 사라진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카를라처럼 자신이 가진 작위는 없고 배우자의 작위만 있는 경우는 일이 복잡했다. 간단히 영지와 작위를 반납하면 될 일이었지만, 나와 왕 사이에는 엮인 사업이 있었다.
내가 귀족이 아니게 된다면 카지노 사업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명목상의 사장이기는 하지만 당장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왕실이 큰 손해였다. 그 결과, 왕실은 내게 백작위의 계승을 허락했다.
‘서류에 사인만 하면 되니까 다행이지.’
복잡한 절차 대신 서류에 사인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 다행이었다. 밀린 서류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백작과 집사가 슬렁슬렁 일한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나와 벨이었다. 나는 투덜거리며 이미 죽은 백작을 욕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향했다. 전령은 나를 보자마자 화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내가 인사하자 전령이 허리를 숙이고 들고 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안에는 천으로 싸인 꾸러미가 있었는데, 그것을 펼치자 둘둘 말린 양피지 뭉치가 나왔다. 전령은 그것을 천천히 펼쳤다.
“왕실에서 고한다.”
테오도르와 벨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도 반 박자 늦게 허리를 숙였다. 전령은 왕실이 내게 백작위를 내린다는 요지의 글을 읽은 후, 테이블 위에 양피지를 올려놓았다. 자연스럽게 내가 들고 있는 펜으로 사인하려고 하자, 전령이 품에서 작은 잉크병을 꺼냈다.
“잉크는 이것을 이용해 주십시오.”
검푸른 잉크를 훑어보자 전령이 입을 열었다.
“특수한 재료로 만든 겁니다. 양피지는 표면을 긁어낼 수 있으니, 깊게 스며드는 잉크를 쓰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촉에 잉크를 묻혀 서명했다. 가죽이라 그런지 종이에 쓰는 것과 감촉이 달랐다. 거기다 잉크가 쉽게 마르지 않아, 우리는 한참 동안 마주 앉아 있어야 했다.
손가락 끝에 잉크가 묻어나지 않자 전령은 양피지를 둘둘 말아 꺼낸 순서의 반대로 정리해 넣었다.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전령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이제 카를라는 백작 부인이 아니라 백작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손목을 매만지자 전령은 다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이것은 세 번째 왕녀님께서 오랜 친구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왕녀라면 왕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축하주를 사고 싶으니 조만간 놀러 와.”
왕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는데도 전령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깜짝 놀라자 전령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전할 말씀이 있다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집사를 구하는 대로 방문하겠다고 전해 주게.”
“네.”
전령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벨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을 나섰다.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왕의 말은 말이 권유지,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 왕녀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기는 했지만, 왕의 말이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얼른 집사를 구해야겠어.’
찌뿌둥한 허리를 두드리며 집무실로 향했다. 집사를 구하는 공고를 내려면 우선 쌓인 일감부터 처리해야 했다.
놀랍게도 밀린 일을 모두 처리하기 전에 집사가 되고 싶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백작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추천장은 있나?”
“네.”
그가 내민 추천장은 무려 왕실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