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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2)화 (92/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2화

    풍등을 띄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장은 순식간에 북적이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치이기 전에 자리를 뜨자 싶어 몸을 틀자마자 지나가던 사람에게 떠밀렸다.

    ‘깜짝이야!’

    그냥 서 있었다면 중심을 잡을 수 있었을 테지만 움직이고 있던 터라 순간 몸이 크게 휘청였다.

    “카를라 님!”

    테오도르의 손이 나를 잡았다. 그는 재빠르게 내 허리를 감싸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등에 테오도르의 가슴팍이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테오도르가 부축해 주어 간신히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람이 많네요.”

    방금 있었던 일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는데, 간신히 나온 것이라곤 멍청한 소리였다. 나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욕했다.

    ‘축제인데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거잖아. 멍청한 소리도 정도가 있어야지.’

    다행히 테오도르는 내 말을 광장에 사람이 갑자기 모여 놀랐다는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예, 아무래도 더 어둡기 전에 풍등을 날리고 싶은 사람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는 조금 더 있으면 발 디딜 곳 없이 사람이 꽉 찰 것이라며 나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마차에서 풍등을 구경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좋아요.”

    마차에 가면 조용히 있을 수 있으니 더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밖으로 향했다. 워낙 사람이 많아 몇 번이고 떠밀리며 걸어가야만 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테오도르를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수준이었다.

    ‘눈이 뒤통수에 달렸나, 왜 이렇게 밀치는 거야.’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서로를 마구 밀치며 지나갔다. 넘어지는 사람이 없는 게 용했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속으로 욕을 곱씹고 있는데 테오도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복잡한 곳이니 잠시 손을 맡겨 주시면 에스코트하겠습니다.”

    평소라면 팔을 굽혀 내밀었을 그가 손을 내미니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하긴, 우아하게 팔을 쥐고 옆으로 걷는 것보다는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게 나은 판단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손을 잡아 보냐 싶어 냉큼 그의 손을 쥐었다.

    “부탁드려요.”

    테오도르의 손은 뜨거웠다. 검을 쥐는 사람들 특유의 굳은살이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에 박혀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웠다. 나는 손에 힘을 줘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테오도르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능숙하게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풍등이 걸린 거리를 걷고 있자니, 그와 함께 우주를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울퉁불퉁한 길바닥이 솜사탕처럼 푹신하게 느껴졌다. 둥실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넓은 등과 우직한 팔을 바라보며 몽롱한 기분으로 발을 놀렸다.

    그의 손목에 걸린 새까만 팔찌가 흔들거릴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마차를 세워 놓은 곳까지는 분명 한참 걸렸을 텐데도 찰나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떨어지는 손이 너무나 아쉬웠다.

    마부는 착실하게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도 축제를 신나게 즐긴 모양인지 입가에 소스가 잔뜩 묻어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님!”

    “그래, 자네도 즐거웠던 모양이군.”

    입가를 톡톡 치자 마부가 허둥지둥 입가를 닦아 내었다. 그러나 입가에 묻은 소스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가서 닦고 오게.”

    “아닙니다. 마차를 지켜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나는 큭큭 웃으며 그의 기행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얼마나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마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풍등을 날렸나?”

    “아이고, 절대 아닙니다. 왕실에서 풍등을 띄우자마자 마차로 돌아왔는걸요.”

    그는 자신을 질책한다고 생각하는지 손을 마구 내저었다.

    “하나 띄우고 오게. 명색이 축제인데 풍등 한번 못 띄워서야 서럽지 않겠는가.”

    나는 테오도르에게 돈주머니를 받아 그에게 내밀었다. 아직 동전이 절반 이상 남아 있어 묵직했다. 마부는 화색이 되어 꾸러미를 받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다녀오게. 돈이 남으면 하녀들 줄 각설탕 좀 사 오고.”

    “감사합니다!”

    마부는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간신히 테오도르와 둘만 남을 수 있게 되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다들 풍경을 띄우러 간 모양인지 주변에는 드문드문 마차 몇 대만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 경, 저는 풍경을 더 구경하려고 하는데 먼저 마차에 오르시겠어요?”

    “아닙니다. 옆을 지키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풍등 수십 개가 하늘을 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자니 방금 있었던 일이 정말 꿈처럼 느껴졌다. 테오도르와 손을 잡고 풍등이 주렁주렁 걸린 거리를 헤치던 순간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팔찌 덕분에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손목을 들어 올려 팔찌를 만지려는 순간, 툭 소리를 내며 실이 끊어졌다. 테오도르가 떨어지는 팔찌를 낚아채어 내게 내밀었다.

    “어머, 팔찌가…….”

    그리고 동시에 그의 팔찌도 실이 끊겨 소매 안쪽으로 떨어졌다. 나는 팔찌를 받아들고 훑어보았다. 그가 매어 준 매듭 옆의 실이 해진 모양 그대로 풀려 있었다.

    “테오도르 경의 소원은 이루어졌나요?”

    “네.”

    “다행이다. 저도 그래요.”

    그의 뺨은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는데,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퍽 야릇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가르쳐 주기로 하셨잖아요.”

    몰아붙이듯, 그에게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비셨어요?”

    테오도르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조급증이 일었지만, 그에게 재차 묻지는 않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풍등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마침내 테오도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과 손을 잡고 싶다고 빌었습니다.”

    테오도르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는 이 감각의 이름은 환희였다.

    “그거 아세요?”

    어떻게 이 이상 더 기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같은 소원을 빌고, 같은 시간에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운명 같았다. 나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저도 같은 소원을 빌었어요.”

    * * *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풍등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서 흩어지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차가운 공기마저 기꺼웠다.

    “테오도르 경.”

    “네, 카를라 님.”

    실없이 부르는 말에도 테오도르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성실함이 좋았다. 항상 내 등을 지켜 주는 듬직한 기사에게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테오도르에게 내 상황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카를라로 있지 않아도 되는 공간은 여기가 유일했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예.”

    테오도르는 놀라지 않았다. 왕과 이야기할 때도, 신에게 메시지를 받았을 때도 그도 함께 있었으니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할 것이다.

    “어떻게 왔는지는 저도 몰라요. 신은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지만, 저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도 테오도르 경을 좋아하지만, 경과 특별한 관계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하고 입을 떼고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추한 욕망을 꺼내기 부끄러웠다.

    내가 사라지면 카를라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나 말고 카를라를 좋아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 멋대로 그녀의 인생을 휘저어 놓은 주제에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를라가 돌아오면 놀라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원해서 내가 이곳에 왔다고 해도 너무나 많은 게 바뀌었으니,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테오도르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네?”

    “저는 카를라 님과 특별한 관계가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두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미소였다.

    “어째서요?”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되묻는 말에 테오도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의 마음에 잠시라도 담길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저를 기쁘게 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 말은 절절한 순애를 담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달콤한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테오도르 경이 왜 저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강력한 기억을 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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