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91화
우리는 광장 근처의 찻집에 자리를 잡았다. 피데스가 말했던 찻집이라는 게 이곳인가 했으나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게 안은 훈훈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따끈한 공기에 섞인 차 냄새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차가 한 종류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맛을 보니 퍽 그럴싸해 기분이 좋았다. 만족스러워하는 내게 테오도르가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차도 깔끔하고.”
나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자가 이만큼만 차를 끓이면 소원이 없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붉게 달아올랐던 뺨은 금방 열기를 잃었다.
“다행입니다.”
테오도르가 눈을 휘어 웃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밖에서는 워낙 정신이 없어 남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조용한 가게 안에서는 사람을 훑어볼 여유가 생기니 벌어지는 일이었다.
‘가발을 썼다고 외모가 가려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다시 그의 외모에 감탄했다. 성기사라는 직함을 떼고도 이렇게 많은 시선을 모으는 걸 보니, 스스로 잘생긴 것을 모른다는 건 거짓말 같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테오도르가 입가를 만졌다.
“뭔가 묻었습니까?”
“아뇨, 테오도르 경이 잘생겼다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서요.”
내가 놀리자 그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내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다가 내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놀리시면 부끄럽습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미남이신걸요.”
나는 그를 적당히 놀리기로 했다. 더 놀렸다가는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돌려 찻잔을 보자,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꽃 모양 같네.’
바닥에 말라붙은 차 찌꺼기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차를 더 주문하고 올게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요.”
자신이 가겠다는 테오도르의 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찻값을 내주었다.
고작 차를 주문하는 간단한 일이었으나 여행지에 온 것처럼 들떴다.
“차를 두 잔 더 주시겠어요?”
“네, 안쪽 자리죠?”
“맞아요.”
직원이 돈을 거슬러 주며 물었다.
“혹시 같이 오신 분은 가족분이신가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뇨, 같은 저택에서 일하는 기사님이에요.”
“역시 기사님이셨군요!”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기사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직접 물어보세요.”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나간 목소리에 깜짝 놀라 덧붙였다.
“마음대로 알려 드리면 불쾌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마자 보인 것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테오도르였다.
“이름이 뭐예요?”
“기사님이세요?”
귀엽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테오도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같이 온 여자분은 동생인가요?”
내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그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테오도르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당황해서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있겠지. 그러나 그는 곧 능숙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저는 모시는 분이 있는 기사로, 이름은 감히 밝힐 수 없습니다.”
내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에 몇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싶은 호기심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함께 오신 분은…….”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의 귓바퀴가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분입니다. 오늘은 함께 축제를 즐기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몰려든 사람들은 흥이 식은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직접 고백을 받은 적도 있으면서 공개적인 곳에서 그의 마음을 엿듣고 있자니 가슴이 시끄럽게 뛰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얼굴이 붉어진 건 아닌지 뺨에 손을 몇 번이나 대어 보았다.
“아는 사람인가요?”
자리에 앉으며 묻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모르는 분들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었지만, 목이 타는지 빈 찻잔을 자꾸만 들었다 놨다. 때마침 직원이 차를 새로 따라 주자 그는 찻잔을 단숨에 반이나 비웠다.
‘귀엽긴.’
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전과 똑같은 차임에도 불구하고 향이 더 좋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찻잔이 다시 바닥을 보일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 위에 둥근 점이 하나둘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큼직한 풍등이었다.
“벌써 등을 띄우는 사람이 있네요.”
“지금부터 풍등을 띄우겠다는 표식일 겁니다. 왕궁에서 띄우는 것이라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큼직하게 만듭니다.”
“그렇군요. 신기해라.”
왕궁은 시내와 거리가 있는 편인데도 저렇게 잘 보이는 것을 보니 얼마나 크게 만든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풍등을 사는 걸 깜빡했어요. 지금 사러 가도 예쁜 게 남아 있을까요?”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문 게 아니니 많이 남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즉시 가게를 나왔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지 찬 공기가 신선했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자 좌판이며 가게에 묶어 놓은 풍등에 하나씩 불이 켜졌다.
바람이 불면 풍등이 흔들거리며 거리를 비췄다. 낮보다 더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가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살피다 보면 사람에게 치였고, 사람을 피하면 불룩 튀어나온 바닥에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내가 도통 나아가지 못하자 테오도르가 팔을 내밀었다.
“잡으시겠습니까?”
“고마워요.”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사람이 많아 풍등을 훑어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간신히 마음에 드는 풍등을 찾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 경, 이건 어떤가요?”
세로로 길쭉한 모양의 풍등이었다. 초롱불처럼 네 방향으로 각이 져서 글자를 적어 넣기도 좋아 보였다.
“튼튼하게 만들어져 오래 날 것 같습니다.”
“그럼 이걸로 해야겠어요. 얼마예요?”
풍등은 꽤 값이 나갔다. 좋은 풍등이기 때문이라며 주인은 값을 조금도 깎아 주지 않았다. 크게 실랑이할 생각은 없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른 후, 주인에게 잉크가 묻은 펜을 받았다. 가게 가장자리에 서서 글자를 쓰고 펜을 돌려주면 되는 모양이었다.
‘뭘 쓰지?’
싸구려 팔찌와 달리 풍등에 쓸 말은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테오도르 또한 고민하는 눈치였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글을 써야 할 것 같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적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글로 또박또박 적어넣고 나서 테오도르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그는 펜을 받고 나서도 좀 더 고민하더니, 내가 글을 쓴 곳 반대편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풍등을 잡아 주는 척, 글자를 훑어보았다.
‘카를라 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심장이 짜르르 울렸다. 그는 과하게 내게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작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왜 이렇게 내게 잘해 주는지 묻고 싶었으나 마른침과 함께 궁금증을 삼켰다.
“풍등은 어디에서 날리면 될까요?”
“글쎄요. 왕궁과 신전에서는 날리는 장소가 정해져 있습니다만…….”
테오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날리면 풍등이 떨어질 때 위험할 수 있으니 한적한 곳에서 날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가게 주인이 광장 방향을 손가락질했다.
“풍등은 광장에서만 날려야 해!”
“감사합니다.”
다시 인파를 헤치고 광장으로 향하니, 정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풍등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풍등의 중앙에 기름을 잔뜩 먹인 심지가 들어 있어 그 부분에 불을 붙이면 되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능숙하게 풍등에 불을 붙이고 내게 종이 가장자리를 잡게 해 주었다.
“안쪽 공기가 충분히 데워지면 저절로 떠오를 겁니다.”
“신기하네요.”
풍등이 조금씩 따뜻해지자, 힘을 주어 잡지 않아도 공중에 둥실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풍등의 불빛에 비춰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오도르 경.”
나는 홀린 듯 그를 불렀다. 불을 확인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파란 눈동자는 조금도 일렁이지 않고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셋 하면 같이 손을 놓을까요?”
그가 미소 지었다.
“네.”
나는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손을 놓자 풍등이 흔들거리며 둥실 떠올랐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미 다른 사람들이 띄워 놓은 풍등들이 보였다.
새카만 하늘에 수많은 풍등이 별처럼 수놓여 있었다.
“와아…….”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날려 보낸 풍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질 때쯤에야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테오도르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의 다정한 미소를 지우고 싶지 않아 그냥 모르는 척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