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9화
거리는 어수선했다. 축제의 시작은 해가 진 이후라고 했는데도 준비하는 사람이며 구경하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들뜬 얼굴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가게 앞은 색색의 등을 걸어놓거나 단장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어느 나라나 축제에는 장사꾼들이 모이는 건 똑같은 모양이었다. 가게가 끝나는 길목에는 임시로 놓은 듯한 좌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혼잡스러운 상황에 테오도르는 당황스럽다는 듯 변명했다.
“외곽이라 이렇게 혼잡한 것 같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좀 더 쾌적할 겁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축제는 혼잡스러운 맛이 있어야죠.”
사람이 많으면 머리가 아파 피하고 싶기는 했지만, 테오도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자니 그렇게라도 말해 둬야 그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마님, 제가 시중을 들까요?”
함께 온 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완전히 들떠서 주변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린 리자와는 달랐다.
“테오도르 경이 함께 있는데 무슨 문제니.”
“그래도 불편하실 텐데요.”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불편할 테지. 감수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고 실컷 놀아라. 필요하면 찾을 테니까.”
“혼잡해서 찾기 어려우실 거예요.”
벨은 혼잡한 거리에서 내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하냐며 연신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강도에게 습격당했던 것이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말이 길어지자 테오도르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는 눈이 좋은 편입니다. 카를라 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두 분을 찾겠습니다.”
그제야 주근깨가 뿌려진 콧잔등의 주름이 사라졌다.
“필요하시면 꼭 부르셔야 해요?”
걱정할 거리가 사라지자 거리를 힐끔거리는 것이, 그녀도 축제가 꽤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벨과 리자를 보내 버릴 생각에 손을 내밀었다.
“챙겨 나온 것 주고 가서 놀려무나. 등불을 다 띄우고 나면 여기로 돌아오는 거 잊지 말고.”
“네, 마님.”
벨은 허리에 찬 꾸러미를 끌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내가 원한 돈주머니가 맞는 듯했으나 그것은 내 손바닥이 아닌 테오도르의 손으로 향했다.
“성기사님, 마님은 몸이 많이 약하시니 바람을 맞지 않게 해 주시고, 축제 때는 아무래도 위생이 좋지 않으니 길거리 음식은 될 수 있으면 드시지 마시고, 아차, 마님은 생선을 잘 못 드세요.”
그녀는 내가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테오도르에게 구구절절 주의할 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과하지 않게 핀잔을 주었다.
“벨, 말이 길구나.”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은 영 못 미덥다는 눈치였다.
“얼른 가 봐. 이렇게 모여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잖니.”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손을 내젓자 리자가 활짝 웃으며 벨을 잡아끌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만은 그녀가 구세주로 보였다. 가만히 뒀다간 발을 떼지도 못할 뻔했다.
나는 마부에게 돌아올 시간을 일러주고 테오도르를 향해 물었다.
“우리도 갈까요?”
“네.”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팔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나는 지금 하녀니까, 기사랑 팔짱 좀 낀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왁자지껄한 거리로 발을 딛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가게마다 걸려 있는 등불이었다. 모양도 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것은 둥글었고 어떤 것은 동물 모양이었다. 알록달록한 것들에 시선을 뺏겨 자꾸 발을 헛디뎠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마다 테오도르는 내 팔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테오도르 경, 보세요. 용 모양 등불이 있어요.”
나는 발가락으로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는 용 모양 등불을 가리켰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등불이 가게 간판에 붙어 흔들거리고 있었다. 저걸 사서 날리면 퍽 멋지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테오도르가 조용히 물었다.
“저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멋지잖아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요?”
그는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보통 저런 건 어린아이들이 날리는 등불이라 멀리 날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실망감에 손가락을 내리자 테오도르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성인 중에도 저런 등불을 날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위대한 분의 눈에 띄기 쉽다는 속설도 있어 직접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어린아이들이나 날리는 등불에 흥미를 보였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한 것뿐이었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테오도르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아 맞장구를 쳤다.
“대단하네요.”
“저도 어릴 적에는 용 모양 등불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카를라 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말이었는지, 그는 퍽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엽긴.’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고가의 물건을 파는 것 같았다. 좀 더 들어가자 자투리 천과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가 여럿 나타났다. 가판대에 올려놓은 것들은 그리 정교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덕분에 구경하는 맛이 났다.
개중 그럴싸해 보이는 팔찌가 있어 손목에 올려 구경하고 있자니 불쑥 주인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 싸게 해 줄게.”
처음엔 내게 하는 말인 줄 몰라 멍하니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안 비싸. 이만큼만 줘.”
주름진 손가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얼마를 뜻하는지 몰라 머뭇거리자 주인이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좋은 거야. 첫 손님이니까 싸게 해 줄게. 뒤에 기사님은 남편인가?”
“아니에요!”
“그래?”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그럼 남자친구야?”
테오도르를 남자친구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단번에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주인의 입가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주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사이구만? 그럼 두 개 사서 하나씩 나눠 가지자고 해 봐. 얘는 내 거라고 도장을 찍어 두는 게 중요하다니까?”
나는 그녀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로 들뜬 틈을 타 테오도르에게 팔찌 하나를 선물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좌판을 훑어보자 팔찌는 색만 다른 것이 몇 가지 놓여 있었다.
좌판 앞에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팔찌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자, 테오도르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검은 실로 꼬아 만든 팔찌와 푸른 실로 꼬아 만든 팔찌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두 개는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꽃 모양으로 꼬인 게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싶기는 했으나 정작 중요한 끝부분이 영 엉성했다. 하필 그런 걸 고르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주인장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만큼만 주쇼.”
그녀는 손을 쫙 펴 보였다. 금속으로 만든 팔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가격에 인상을 썼다.
‘이거 바가지 아니야?’
그러나 테오도르는 흥정 한번 없이 흔쾌히 돈을 냈다. 품에 넣은 돈 꾸러미에서 동전을 꺼내 값을 치르는 것을 빤히 구경했다. 벨이 저택의 잔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만든 돈주머니였다.
‘평소엔 단위가 큰 돈만 쓰니까 동전으로 계산하는 게 신기해.’
내 시선을 눈치챈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렸다.
“소원이 이뤄지는 팔찌입니다.”
“네?”
그는 푸른색 팔찌를 내게 보여 주었다. 다시 보아도 묶는 부분이 엉성한 것이 쉽게 끊어질 것 같았다.
“소원을 빌고, 하루 동안 차고 다니다가 잠들기 전에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일종의 소원 팔찌인 셈이었다.
“끊어지기 쉽게 만든 것 같은데요.”
“기분을 내는 거죠.”
테오도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그랬다. 어차피 축제의 들뜬 기분에 사는 상품이니, 소원이 진짜 이루어지냐 아니냐를 진지하게 따지는 건 소용이 없었다.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나는 팔찌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내 손바닥 위에 팔찌를 올려주는 대신, 손목에 팔찌를 묶어 주었다. 그는 섬세하게 매듭을 두 번 묶어 주곤 손을 떨어트렸다.
“어떠십니까?”
“아, 네. 예쁘네요.”
어설프게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이제 소원을 비시면 됩니다.”
나는 멍하니 팔찌를 보며 뭘 빌어야 좋을지 생각했다. 어차피 싸구려 팔찌니까 거창한 걸 빌어 봤자 이뤄지지 않을 테니, 소소한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음, 테오도르랑 손 한번 잡게 해 주세요?’
음흉한 소원에 속으로 킬킬거리며 팔찌를 문질렀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끝나셨습니까?”
“네, 다 빌었어요.”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팔찌를 묶으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정직하고 우직했으나, 가끔 허술한 면이 있었다.
“제가 묶어 드릴까요?”
가볍게 묻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내민 팔찌를 쥐고 묶기 시작했다. 그의 손목뼈에 자꾸만 손가락 끝이 스쳤다. 그가 내게 해 준 것처럼 두 번 매듭을 묶었다.
“소원 비셨나요?”
“네, 빌었습니다.”
문득 그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 궁금해졌다. 나처럼 음흉한 소원은 아닐 테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무슨 소원인지 물어봐도 돼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뤄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