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8화
테오도르와 데이트를 하겠다는 야심은 바로 무너졌다. 한동안 우중충한 상복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우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최소 일주일은 상복을 입어 주는 게 예의라고 했다. 상복 따위는 입고 싶지 않았지만, 남들이 나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미 수사가 끝난 시점에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왕의 기사들이 나를 의심하는 것 같던데 소문이 잘못 나면 재수사를 하자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자가 압박감에 못 이겨 실토하면 나는 그대로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당분간 백작이 죽어서 슬프다는 핑계로 사교 활동은 자제해야겠어.’
다짐하기가 무섭게 저택으로 차용증이 쏟아졌다. 백작의 빚을 내가 갚는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급한 것부터 처리하자는 생각에 일에 한번 손을 대었더니 멈출 수가 없었다.
덩달아 벨과 테오도르도 고생했다.
“마님, 영지의 보고서에 이상한 부분이 세 곳 있어요.”
“숫자 실수면 그냥 두고 장부 조작이면 따로 적어 둬.”
“네.”
벨은 이제 전담 시녀라기보다는 집사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집사가 하던 일의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일들에 겁을 먹은 것도 잠시, 그녀는 평생 그 일만 해 온 것처럼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일을 하는데도 양이 너무 많아 아침 일찍부터 집무실에 틀어박혀 저녁 늦게나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테오도르의 수면 시간도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눈 밑이 거뭇해질 때쯤, 책상 위를 어지럽히던 서류도 얼추 정리되었다.
‘놀고 싶다.’
한동안 계속 일이 터져 제대로 쉬지 못했더니 휴식이 절실했다. 펜을 쥔 손의 힘이 풀리자 벨이 차를 타 오겠다며 집무실을 나갔다. 차를 타 온다는 핑계로 도망간 건 아니겠지, 같은 허튼 생각을 하며 책상에 엎드려 한숨을 쉬었다. 내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테오도르가 말을 걸어왔다.
“카를라 님, 조금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네, 벨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 이렇게 있을 거예요.”
흉한 꼴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어설 힘도 없었다. 늘어진 그대로 게으름을 부릴 요량이었다. 내가 앓듯 말하자 테오도르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업무에 열중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산책이나 나들이도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는 잘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역설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했던지 그만 일어나 박수를 칠 뻔했다.
“곧 축젯날이 다가오니 수도의 거리도 화려할 겁니다. 둘러보시면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릅니다.”
“축제요?”
축제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테오도르는 내가 흥미를 보이자 열심히 축제에 관해 설명했다.
“수도에서는 수확제 대신 축제를 엽니다. 신전에서는 아이들에게 종이와 잉크를 나눠 주고, 간단한 글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조금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밤에는 풍등을 띄웁니다. 하늘에 수천 개의 풍등이 떠다니는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풍등이요?”
풍등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새카만 하늘 위를 수놓은 노란 불빛을 떠올렸다.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테오도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직접 만드는 게 대부분이지만 살 수도 있습니다. 왕실에서는 사람들에게 풍등을 나눠 주기도 하고요. 풍등에 소원을 적어 날려 보내면 위대한 분께서 읽고 답을 주십니다.”
마지막 말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계의 신은 어쩌면 활자 중독자일지도 모른다.
‘방구석에 박혀서 책만 읽느라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속으로 신을 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네요.”
테오도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가 내가 그 외의 대답을 하지 않자 점점 초조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는 못했는데, 목덜미를 긁적이는 모습이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마침내 테오도르가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
“네, 테오도르 경.”
“아직 상복을 입는 기간이고, 카를라 님의 마음에 수심이 깊어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위대한 분의 가르침에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꿀꺽. 테오도르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축제에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표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왜요?”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 뱉은 말은 고작 한마디뿐이었다. 테오도르의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를라 님께 아름다운 것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도 잊고 테오도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열성적으로 축제 이야기를 한 이유가…… 그냥 내게 예쁜 걸 보여 주고 싶어서라고.’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가요.”
* * *
축제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상복이 문제였다. 즐겁게 놀자고 가는 곳이니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예쁘게 꾸미고 가고 싶었다.
‘흠. 어쩐다.’
내가 서류를 앞에 두고 고민하자 벨이 차를 내려놓으며 슬그머니 물었다.
“마님, 보고서를 다시 작성할까요?”
“아니, 아니야. 다른 생각 중이었어.”
황급히 손을 내젓자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급한 서류는 얼추 해치웠으니 벨에게도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벨, 저번 축제 때는 뭘 했니?”
“저번 축제요?”
벨은 잠시 생각하곤 대답했다.
“작년에는 감기 기운이 있으셨어요.”
“감기 기운?”
“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기침을 크게 하셨어요.”
나는 벨이 무엇을 했는지를 물었는데 그녀는 카를라가 작년에 뭘 했는지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카를라가 축제를 즐기지 않았다면 전담 하녀인 벨 역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랬지. 올해는 풍등을 띄워 보자꾸나.”
“축제에 가실 거예요?”
“그래.”
벨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순간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카를라가 있을 때나 내가 있을 때나 벨은 항상 고생만 하는구나.’
상사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게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겨 주기로 마음먹었다.
“드레스는 어느 것을 입고 가실 생각이세요?”
벨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상복을 입는 기간이잖니.”
“아…….”
그녀는 얼른 입가를 가렸다. 말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택 분위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백작이 죽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인 척하고 나가려고. 화장을 다르게 하면 감쪽같지 않을까? 아니, 아예 하녀인 척해도 될 거야.”
이전에 화장으로 나를 다른 사람처럼 만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남는 하녀복을 찾아봐야겠어요.”
그녀는 흔하지 않은 일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성기사님도 다른 사람처럼 변장해야겠네요!”
“그렇네.”
내가 아무리 잘 변장해 봤자 테오도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러나 카를라의 얼굴은 밋밋해 변장하기가 쉬웠지만, 테오도르의 외모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의 외모는 어떻게 숨긴다고 해도 머리카락과 눈 색이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의 조합은 흔치 않다고 하니 더 특정되기 쉬울 것 같았다.
팔짱을 끼고 고민하자 테오도르가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가발을 쓰면 됩니다.”
“아!”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햇빛에 반짝이던 금발이 가발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말해 주기 전까지 테오도르와 금발의 기사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테오도르는 무난한 정장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사티가 숨겨지지 않았다. 반면 나는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백작 부인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에스코트하겠습니다.”
“하녀를 에스코트하는 기사님은 눈에 띌 것 같은데요.”
테오도르가 내게 너무 깍듯하게 구는 탓에 들킬까 봐 에스코트를 사양하자, 그가 강하게 주장했다.
“기사와 하녀의 로맨스는 흔한 일입니다.”
벨과 리자에게 확인하려고 했으나 테오도르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리는 수도 근처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한 후, 근방에서 내려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백작이 죽자마자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러나 곧 이성이 빠르게 반박했다.
‘내가 독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잔만 살짝 바꿔치기한 것뿐이잖아.’
백작 때문에 고생한 것들을 떠올리자 금방 죄책감이 사라졌다. 마차가 뒤집히고, 강도에게 위협당하는 일은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합리화를 마쳤다.
나는 남은 죄책감을 마저 지우기 위해 테오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가슴을 쿡쿡 찌르던 양심통이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