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7화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저택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벨은 내가 눈을 뜨자마자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백작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일이 쏟아졌다.
우선 왕의 기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백작의 사인을 파악했다. 깨진 와인 잔과 독이 묻은 유리병을 본다면 누구든 추측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그들의 말투는 깍듯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날을 세운 것처럼 예리했다.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습니까?”
“식당 근처에 오지 말라고 명령하셔서 근처에 막내 한 명만 세워 두고 빨래를 도우러 갔어요.”
“마님께서 방을 지키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식당에서 사용인들을 물린 덕분에 누구 하나 백작이 죽은 정확한 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리자는 내가 시킨 대로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모,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백작님이 와인을 내오라고 하셔서 내왔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얼굴이 신빙성을 높여 주었는지, 기사들은 리자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테오도르 또한 조사를 받았지만 능숙하게 피해 갔다.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도 말하지 않는 방법으로 기사들을 속였다.
“위대한 분의 이름에 맹세코, 카를라 님은 와인에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저 하녀분이 독을 넣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당당하게 기사들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사람을 속이는 것도 할 줄 아네.’
테오도르는 리자가 독을 넣었다는 걸 알고, 내가 와인 잔을 바꿔치기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독을 넣은 건 아니고, 리자가 독을 넣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테오도르를 바라보자 그가 오른쪽 눈을 감았다 떴다.
무슨 신호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자, 그가 다시 한번 오른쪽 눈을 감았다 떴다.
‘설마 저거 윙크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볼 안쪽을 깨물어 참았다.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본 기사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들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사용인들과 달리 응접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자고 권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들은 퍽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얼렀다. 빳빳하게 다린 손수건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건네준 손수건을 손에 쥐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이런, 하녀에게 차를 타 오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들은 내가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여인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오해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긴장은 풀지 않았다. 말이라도 한번 잘못 했다가는 그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나를 몰아세울 것 같았다.
“부인,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곤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첫마디를 고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혼 이야기를 하던 와중이었어요.”
이야기하던 중 나도 모르게 웃을지도 몰라 손수건을 뗄 수가 없었다. 한번 입을 떼니 무서울 정도로 술술 말이 터져 나왔다.
“카드 게임을 해서 제가 이기면 이혼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카드 게임을 했어요.”
“아, 식당의 그 카드들은 그래서…….”
“무슨 종류였는지도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들은 카드 게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성기사님과 하녀는 왜 그곳에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카드를 공정하게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 리자를 불렀어요. 그리고 성기사님은…….”
기사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최대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불렀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백작님이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증인으로 와 주신 거예요. 제가 이겨도 백작님이 발뺌하면 이혼할 수 없으니까요.”
그들은 흥미롭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그 말씀은, 어떻게든 이혼을 하고 싶으셨다는 뜻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기사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계속 질문을 이어 갔다.
“게임은 누가 이겼습니까?”
그들은 내가 게임에 져서 홧김에 백작을 죽인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제가 이겼어요. 테오도르 경, 아니, 성기사님께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성기사가 보증했다면 확실하겠군요. 그동안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기억나십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했어요. 리자가 와인을 가지러 간 사이에 잠시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묻는 줄 알았던 터라 잠시 머뭇거렸다. 제대로 된 대화는 없었다. 간신히 기억을 더듬어 대화 같은 대화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나를 사랑하기는 했나요?]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저 백작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물어본 말이었지만, 동시에 카를라를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백작에게 아주 잠시라도 사랑받았다면 그녀에게 위안이라도 되지 않을까 해서.
아니, 그건 순전히 나를 위한 질문이었다. 내가 카를라의 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가 그녀를 잠시라도 사랑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부정보다 더 차가운 조롱의 말이었다.
분노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미 죽었지만, 뺨 한 대라도 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수건을 쥐어뜯고만 있자 기사가 다시 물었다.
“힘드시겠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셔야 수사에 도움이 됩니다.”
“…….”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저를 한 번이라도…… 사랑하기는 했냐고 물었어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기사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들은 지뢰를 밟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랬더니, 그럴 리가 있냐고…….”
이를 악물었더니 목소리가 울음처럼 불분명하게 뭉개졌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이를 갈 것 같았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자마자 그대로 쓰러졌어요.”
더듬더듬 말을 끝마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더 물어볼 게 남았나?’
나는 그들을 힐끔거리며 다음에 할 말을 정리했다. 청산가리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물어보는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취조를 받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백작이 정말 죽었는지도 실감이 안 났다.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천천히 손수건을 내렸다. 웃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백작님은 정말 죽은 건가요?”
기사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기사들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한 결과 백작의 사인은 음독에 의한 자살로 확정된 모양이었다.
이혼하고 싶지 않아 자살했다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퍽 로맨틱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날 죽이려다가 자기가 죽은 거지만.’
백작의 장례식은 단출하게 치렀다. 나는 조문객들에게 최대한 슬픈 얼굴을 꾸며내 인사했다. 장의사가 시신을 수습했으나 차마 남에게 보일 만한 몰골은 아니라 목까지 내려오는 흰 천을 덮어야 했다. 그래도 일그러진 얼굴과 목에 상처가 남을 정도로 긁어 댄 흔적을 최대한 수습한 흔적은 감출 수가 없었다.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을 괴롭혔는데 이렇게 쉽게 죽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관을 박차고 나와 소리를 질러 댈 것 같았으나, 그는 무덤에 묻힐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진짜 끝났다.’
장례식이 끝나고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백작이 죽은 탓에 해야 할 일이 넘쳐났다.
좋은 점이 있다면 그의 지위와 영지가 모두 내게 계승되었다는 것이고, 불편한 점이라면 빚도 내가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실보다는 득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이혼보다는 사별이 낫긴 하네.’
나는 속으로 킬킬거렸다.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집사를 새로 고용하고, 벨의 월급을 더 올려 주고, 영지를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도 배워야 했다. 앞으로 정신없이 바쁠 게 분명한데도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테오도르에게 고백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그의 파란 눈동자와 뺨 위로 그늘이 지는 속눈썹, 매끄럽게 정돈된 콧날을 힐끔거렸다. 마차가 덜컹거리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며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