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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6)화 (8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6화

    리자는 아주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발이 철로 만들어진 듯 아주 느릿하고 묵직한 걸음이었다. 리자는 치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유리병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그 속에는 주인의 목숨을 거둬 갈 무서운 독약이 들어 있었다.

    ‘도망가고 싶어.’

    그러나 몸은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리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찬장에서 와인 잔 두 개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제게 맡기지 않을 일에 들떴을 테지만, 지금은 차라리 와인 잔을 깨 버리고 싶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유리잔에 리자의 금빛 머리카락이 비췄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유리병을 꺼내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유리잔 안에 가루를 뿌리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녀가 이때껏 했던 일 중 가장 쉬운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무서워.’

    눈가가 시큰했다. 눈을 크게 떴는데도 불구하고 뺨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리자는 도무지 백작 부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 백작에게 왜 그렇게 덤비는 것일까.

    ‘마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백작 부인에게 각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눈앞에서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백작 부인과 주고받았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마님은 왜 제가 맞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어요?]

    [말해 봤자 넌 모를걸.]

    백작이 화가 나서 손을 들었던 날, 백작 부인은 자신이 맞을 뻔하면서까지 리자를 감싸 주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았다.

    백작이 백작 부인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리자는 고민하기는 했으나 결국 백작 부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때 백작 부인이 했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걸 왜 지금 말하니?]

    [저도 모르겠어요.]

    이전에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었다.

    백작 부인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질게 굴기는 했으나 그녀는 리자가 맞지 않도록 막아 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자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던 것은 사랑이었으나, 그마저도 볼품없게 바랜 지 오래였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앳된 얼굴의 하녀는 시키는 것 외의 것을 할 줄 몰랐다. 그것은 사용인이 가져야 할 미덕이었으며, 평민으로 살아온 리자에게는 천명과 같은 일이었다. 차라리 눈물로 호소할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어떻게 하지?’

    리자는 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방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에는 밀가루 몇 포대와 기본적인 조미료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리자는 쥐고 있던 독약을 와인 잔 위에 쏟아부었다. 희고 고운 가루가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았다.

    * * *

    리자는 한참이나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그동안 백작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야 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 짜증이 밀려왔다. 나 또한 기분이 상한 것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을까, 리자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와인 잔 두 개와 와인 병이 놓여 있었다. 리자가 쟁반을 내려놓기도 전에 백작이 말했다.

    “내가 따지.”

    백작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이나 소매에는 무엇도 들려 있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가 와인 코르크를 따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없어 몇 번을 헛도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겨우 힘을 줘 코르크를 따고 나서도 그는 한참 손을 떨었다.

    그는 잔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와인을 따른 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무심코 잔을 받았다. 유리잔 손잡이에는 꺼끌꺼끌한 것이 묻어 있었다.

    ‘뭐지?’

    손가락 끝에 묻은 흰 결정을 보니 소금 같았다. 와인 잔은 씻은 후 천으로 닦아 내오는 것이라 소금이 묻어 있을 이유가 없어 의아하게 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리자가 독을 넣은 거구나.’

    백작의 손에 독이 들려 있지 않다면, 그가 누구를 시켰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리자가 잔에 무슨 술수를 쓴 것이다. 백작이 와인을 따겠다고 한 건, 어느 잔에 독이 발려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백작에게 알려 주려고 소금을 묻힌 걸까?’

    아니, 그렇다면 백작의 손이 닿지 않을 손잡이에 소금을 묻혀 둘 이유가 없었다. 소금이 묻어 있던 곳은 와인 잔의 몸통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었다. 술을 따를 때는 바닥을 잡고 따르니, 백작은 여기에 소금이 붙어 있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이건 나한테 알려 주려고 일부러 묻힌 거야.’

    어차피 백작이 나에게 독을 먹일 걸 알고 있으면서 굳이 다시 신호를 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들바들 떠는 리자를 보자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붉은 액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작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말 독이 들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백작의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들어 올리자, 그는 곧장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잔에 입을 대었다.

    ‘저 와인은 확실히 안전한가 보네.’

    미리 준비한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가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백작의 잔이 식탁 위에 닿자마자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백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공은 잔뜩 축소되어 있어 간신히 초점을 잡는 것으로 보였다.

    “나를 사랑하기는 했나요?”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요.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 테니까.”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을 때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와인 잔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내 잔을 그의 앞에 밀어놓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턱 아래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백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잔을 들어 가볍게 허공에 부딪히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백작 또한 잔을 들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차가운 액체가 입술에 닿자,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입가를 끌어올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흉측하게 보였다.

    “사랑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러곤 잔을 기울여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꿀꺽, 우리는 동시에 와인을 삼켰다. 달콤한 포도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순간, 그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백작이 쓰러졌다는 것을 인지한 건 와인 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진 순간이었다.

    유리 파편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붉은 액체가 바닥의 홈을 타고 흘렀다.

    “끅, 으, 윽…!”

    백작은 손가락 끝으로 목을 긁으며 바닥을 굴렀다. 자세히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은 나를 올려다보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왜, 왜, 왜 내가……!”

    사람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데도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리자에게 약을 구하게 했을 때부터 줄곧 생각하던 풍경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이혼보다는 사별이 나을 것 같더라고.”

    백작은 끈질기게 나를 죽이려고 했다. 이혼한 후에도 그가 포기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연습했다. 사람의 시선에는 사각이 있다. 정면에 시선을 주면 바로 아래는 인식하기 힘든 점을 이용하여 몇 번이고 잔을 바꾸는 것을 연습했다. 들킬까 봐 떨리기는 했지만,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다 좋은 법이었다.

    “아아악! 악! 끄어억!”

    백작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가, 이내 전원을 내린 것처럼 뚝 끊겼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풀린 동공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소리도 내지 못하는 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자.”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리자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쳐 냈다.

    “독을 넣었던 유리병, 아직 가지고 있지?”

    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병을 꺼내 내게 넘겨주었다.

    “서, 설마, 마님! 안 돼요!”

    병을 받자마자 리자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나쁜 생각 하시면 안 돼요!”

    그녀는 내가 백작을 따라 죽기라도 할 것처럼 나를 말렸다. 방금까지 넋이 나가 있던 주제에 나를 말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어 몸이 휘청일 정도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는 치맛자락으로 병을 박박 문질렀다. 혹시나 남아 있을 리자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러곤 옷소매로 병을 쥐고 백작의 몸 근처로 유리병을 굴렸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이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백작이 쓰러졌다고 해.”

    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불러오라고 시키자,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이제 끝났군.’

    마음이 놓이자마자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테오도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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