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5화
청산가리의 정식 명칭이 뭐였는지 잊었어도 그게 해독제가 없는 독약이라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혀에 대기만 해도 그대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강한 독약이다.
‘이 세계를 너무 우습게 봤어.’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다른 게 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독은 보잘것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걸까.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었다.
완전히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졌다. 이전의 위협과는 달리, 완전히 살해 예고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 * *
고민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행동을 취할 수도 없었다. 백작을 막을 방법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거의 다 나으셨네요.”
벨이 거즈를 갈아 주며 말했다. 손바닥에는 손톱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거즈 때문에 둔해졌던 감각도 완전히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거즈를 붙이고 있고 싶은데.”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아.”
벨은 더 캐묻지 않고 거즈를 붙여 주었다.
‘한동안 시간 벌기는 되겠지.’
백작은 나와 이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돈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신용은 바닥난 지 오래라, 카를라의 이름에 기생하기를 바라는 게 뻔했다. 그러니 한동안 나를 노리지 않은 것이다. 게임을 하지 않는 동안은 나와 이혼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백작도 인간이니 직접 손을 더럽히는 짓은 최대한 하고 싶지 않을 거야.’
지금껏 백작이 내 목숨을 노린 방법은 모두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아무리 인간성이 바닥인 백작이라도 스스로 사람을 죽이는 데는 저항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편 때문에 완전히 돌아 버린 줄 알았는데.’
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감각을 확인했다. 카드 게임은 여전히 능숙하지 못했지만, 몇 가지 속임수는 확실하게 배웠다. 이전보다 더 감쪽같이 소매나 손가락 사이에 카드를 끼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꽤 큰 진전이었다.
‘백작은 내가 이기면 나를 죽여 버릴 생각이야. 그런데 어떤 수를 쓸지는 통 모르겠단 말이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법 같은 걸 주면 얼마나 좋으냐고 투덜거리며 신을 욕했다.
‘생각을 읽을 수 없어도 훤히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시선을 돌려 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청산가리를 구해 온 날 이후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가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을 뺀다면 그 외의 행동은 뻔히 들여다보여 오히려 편했다.
낭창한 얼굴로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고 묻던 리자가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퍽 아이러니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따라 백작 이야기를 하지 않네.’
나는 속으로 킬킬 웃었다. 이런 상황에 백작과 리자의 연애 이야기나 궁금해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 당장 내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건 테오도르였다. 그는 종종 내게 먼저 백작을 죽이지 않겠냐고 권유해 왔다. 자신이 몰래 암살하겠다는 게 주된 이야기라 무시하기는 했지만,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기사들은 원래 암살하는 법을 배우나요?”
“아니요, 배우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능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됐어요.”
나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암살같이 치졸한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실은 테오도르에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자를 시켜 백작에게 아편 덩어리를 먹였으면서, 테오도르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치졸한 생각이었다.
‘그럼 뭐 어때.’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반복했다.
‘테오도르에게 그런 짓을 시키면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거야.’
테오도르에게 부탁하면 금방 끝날 일이고, 설령 들키더라도 왕이나 공작에게 부탁하면 최소한의 벌만 받고 끝낼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멋있는 기사님으로 남아 주었으면 했다.
‘이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괜찮잖아.’
그동안 실컷 마음대로 한 주제에 뻔뻔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거즈가 덕지덕지 붙은 모습은 봐줄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백작이 날 죽이려고 한다면, 눈앞에서 독을 먹이겠지. 그게 확실하니까.’
내가 이기면 백작은 곧장 이혼해야 하고, 백작이 이기면 나를 죽일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니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은 딱 한순간, 카드 게임이 끝난 직후일 것이다.
‘절대 안 죽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거즈를 붙이고 있는 동안 할 일이 떠올랐다.
* * *
나뭇잎이 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코끝에 닿는 아침 공기가 차갑게 느껴질 때쯤, 나는 백작에게 손이 완전히 나았음을 알렸다.
내기는 식당에서 이뤄졌다.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고 문을 굳게 닫았다. 나와 백작은 서로를 마주보고 식탁에 앉았다. 리자가 딜러를 맡고 증인은 테오도르가 맡았다.
그는 우리를 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위대한 분의 이름 아래, 성기사 테오도르는 결투의 증인으로 참석합니다.”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성경을 읊는 것처럼 경건했고, 자세는 기도하는 것처럼 꼿꼿했다. 나는 실소했다. 이혼하느냐, 아니면 죽이느냐의 기로에 선 사람들이 받을 선언치고는 너무 과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모르는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결투의 결과에 대해 이의를 가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십시오.”
“맹세하지.”
“맹세합니다.”
나와 백작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어 맹세했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테오도르가 리자를 바라보았다. 리자는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쓸데없는 소릴.”
백작은 뜬금없이 카를라와 처음 만났던 일화를 늘어놓았다.
“그때의 당신은 정말 순진하고 사랑스러웠지. 내가 무슨 말만 해도 볼을 붉히고 말이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내 앞으로 밀어진 카드를 받아 훑었다. 패는 나쁘지 않았다. 왕이 두 장, 귀족이 세 장이었다. 백작의 표정을 살피려고 했으나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백작의 손가락은 여전히 앙상했고, 그의 눈 밑은 퀭하게 꺼져 있었다. 단기간에 살이 빠져 가죽이 늘어나 진 주름은 세월의 흔적이 아니기에 어딘가 기괴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저 몰골로 나를 죽이려고 한단 말이지.’
우리는 서로 카드를 한 장 내고, 한 장 받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백작은 카를라와의 이야기를 떠들어 대었다.
“공작가를 잇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기던 당신이 갑자기 저택에 욕심을 부릴 줄은 전혀 몰랐지 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저택을 혼자 관리하기엔 벅차지 않소?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편해질 텐데.”
“딱히.”
어깨를 으쓱이자 백작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카드를 한 장 버리는 척하곤 소매 안으로 숨겼다. 다행히 백작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판단력뿐만 아니라 주의력도 흐려졌는지 그 이후로도 내가 쓰는 속임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백작이 갑자기 손목을 잡아 속임수를 폭로할까 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카드를 쥔 손에 자꾸 땀이 찼다. 그러나 내가 왕을 네 장, 귀족을 한 장 모을 때까지 백작은 속임수를 쓰는 걸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패를 내려놓자마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임수를 썼군.”
“언제?”
백작의 트집에 헛웃음을 쳤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내가 유치하게 굴자 백작은 이를 갈며 카드를 식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결과에 승복할 생각이 없다면, 법대로 하지. 증인도 있으니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나겠어.”
나는 입가를 끌어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지로 나를 붙잡아 독약을 먹이려고 할까 봐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자, 그가 허겁지겁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좋아. 당신이 이겼어. 인정하지.”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보자, 백작은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었다.
“당신이 이겼다고. 이혼해 주겠어.”
나는 주섬주섬 카드를 정리하고 있는 리자를 바라보았다.
“리자, 합의서를 가져오렴. 벨에게 물어보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거야.”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말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듯,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마님.”
“아니, 잠깐. 기다려.”
백작이 리자를 멈춰 세웠다. 그의 입가가 기이할 정도로 늘어졌다. 억지로 만든 미소에 본능적으로 불쾌감이 일었다.
“합의서를 쓰기 전에 목 좀 축이지 않겠어?”
그가 리자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당신과 마지막으로 와인 한잔하고 싶어서 그래.”
뻔히 보이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기꺼이 그 함정에 뛰어들기로 했다.
“딱 한 잔이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