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4화
나는 순간 몸을 멈추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뇌가 이해하기를 멈춘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리자는 아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도무지 대화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달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아니면 사용인 숙소로 돌려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리자가 말을 이었다.
“백작님이 독약을 구해 오라고 시키셨어요.”
“언제?”
“오늘 아침에요. 미리 알아 놓은 가게가 있으니 가서 사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리자는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늘 꾀꼬리 같던 목소리가 형편없이 뭉개졌다.
“내기에서 지면 마님을 주, 죽일 거라고 하셨어요. 조심하셔야 해요.”
그녀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잠시 생각했다.
‘백작은 확실히 이길 자신이 없는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속임수를 쓸 거라 생각해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독살할 생각이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를 찔려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자를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사용인은 부릴 수 없으니 리자를 이용한 거겠지. 그만큼 심리적으로 몰려 있는 게 분명해.’
제 손발처럼 부려 온 집사가 사라지니 리자에게 명령한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허술한 사람인지 알면서도 이용할 생각을 한 걸 보면 다른 대안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리자가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해 주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라지면 리자는 백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텐데. 백작이 카를라의 재산을 물려받을 테니 충분히 부유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혹시 함정인가 싶어 그녀의 얼굴을 게슴츠레 훑어보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하니?”
“내, 내일 휴가를 받아서 독약을 사러 가면 마님한테 말씀드릴 기회가 지금밖에 없을 것 같아서…….”
리자는 최대한 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음을 삼켰다. 끅, 끅, 울리는 울음소리가 애잔했다. 아직 독약을 사지 않았다는 말에 마음이 반쯤 놓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으면 네가 백작 부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말한 거니?”
농담처럼 묻자 리자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그녀의 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냥 마님이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녀 자신도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리자의 사고방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달래지 않았다. 대신 휴가를 줄 테니 예정대로 독약을 사러 가라고 명령했다. 리자는 깜짝 놀라 자신의 말을 되풀이했다.
“괜찮아. 사 와.”
“네…….”
그러나 그때마다 단호하게 명령하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약을 사는 걸 방해하면 다음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마차를 전복시키거나 강도를 고용할 정도로 극단적인 수를 쓰는 백작이니, 눈이 뒤집혀 저택에 불을 낼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이 세계의 독약이라고 해 봤자 대단한 수준은 아닐 것 같았다. 마약도 겨우 아편이 알음알음 돌아다니는 수준이니, 독약도 그 수준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이본 남작이 남편을 죽일 때도 꽃의 독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일단 어떤 종류의 독인지 알면 해독제도 있겠지.’
백작도 지금 당장 내게 약을 쓸 생각은 없을 것이다. 리자가 말했듯 내기에서 지면 쓸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당분간 시간이 있었다.
“독약을 살 때 해독제도 있는지 물어봐. 있으면 이름을 알려 주고, 없다고 하면 그냥 돌아와도 좋아.”
“네, 마님.”
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졌다.
‘피곤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왜 카를라가 나를 이 세계에 보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백작과 내기도 해야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일단 복잡한 생각은 다 던져 버리고 일단은 자고 싶었다.
* * *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테오도르에게 이 일을 말해 주었다. 왕의 호위였으니 독살에 관한 대처법이 있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었으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는 말했다.
“앞으로 식사 때마다 제가 독을 확인하겠습니다.”
주방장과 주방 하녀들이 내 식사에 독을 넣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백작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으니, 나를 없애는 데 동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가 기미 상궁도 아니고.’
나는 테오도르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생각에 투덜거렸으나 곧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번 식사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걱정되었는데, 내 앞에서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될 터였다. 물론 사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테오도르가 잘 먹는 걸 보고 싶어.’
얼핏 본 테오도르는 대식가였다. 그가 먹는 모습을 몇 번 보지 못하기는 했으나, 그때마다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으니 원래도 식사량이 많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잘 먹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그러나 테오도르는 당장 점심부터 함께 식사하게 되자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독 검사는 내 식사에서 조금씩 맛을 보는 것뿐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무시하고 식탁에 2인분의 식사를 차리게 했다.
“독을 확인하는 건 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차피 같이 만든 음식인걸요. 제 것을 나눠 드리는 것보다 편하지 않을까요?”
“카를라 님의 접시에만 독이 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접시를 바꾸죠, 뭐.”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바라보며 낭창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테오도르는 그런 행동에도 쉽게 뺨을 붉혔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메뉴였다. 야채수프와 샐러드, 구운 감자와 얇게 썬 고기가 접시 위에 정갈히 담겨 있었다. 테오도르가 먼저 식기를 들었다.
“수프는 이상이 없습니다.”
“한 입 맛보는 정도로 알 수 있나요? 적어도 절반은 드시고 말씀해 주셔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자 테오도르가 머뭇거렸다. 정말 맛만 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좀 더 재촉했다.
“저를 안심시켜 주기로 하셨잖아요.”
그제야 테오도르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나는 그가 접시를 비우는 동안 천천히 얼굴을 감상했다. 그는 식사하는 모습조차도 번듯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프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제야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수프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었으나 오늘따라 더 고소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같은 순서로 샐러드와 구운 감자, 고기가 담긴 접시를 비워 나갔다. 마지막으로 식기를 내려놓자, 벨이 차를 내왔다.
“테오도르 경에게도 같은 차를 내드리렴.”
“네.”
테오도르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혹시 차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을 쥔 테오도르도 퍽 볼만한 그림이었다.
한창 테오도르를 구경하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막 외출했다 돌아왔는지 머릿수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어, 마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주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벨이 그녀를 말리려고 하기 전에 내가 물었다.
“오늘 휴가를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돌아왔니?”
“네, 마님. 오늘 휴가를 받았어요. 그런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 시키신 일이요. 빨리 말씀드리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리자는 주변의 눈치를 보곤 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얼른 조그만 유리병을 그 위에 올려주었다.
병 안에는 흰 가루가 들어 있었다. 얼핏 보면 곱게 갈아 놓은 밀가루처럼 보였다. 내가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자 리자가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에 다시 병을 올려주었다. 그녀는 보이면 안 될 것이라도 되는 듯 그것을 다시 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름은 알아 왔니?”
“네. 천, 청산가리래요.”
리자는 말을 더듬기는 했으나 독약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한계까지 낮춘 목소리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혀를 대기만 해도 죽는다는 약의 이름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백작이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었다.
‘미친 자식.’
입속으로만 백작의 욕을 씹어 삼켰다. 리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해독제는 없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