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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3)화 (83/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3화

    백작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

    테오도르가 검을 쥐는 소리가 났다. 백작은 다시 소리를 지르는 대신 발바닥으로 바닥을 쳤다. 품위 없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퉁명스럽게 울렸다.

    “멋대로 집사를 쫓아낸 것도 모자라 카지노에 출입하지 못하게 수를 쓰다니! 이유가 뭐지?”

    그는 세상 모든 일에 내 핑계를 댈 모양이었다. 아예 해가 지고 뜨는 것도 내 탓을 하지 그러냐고 비아냥거리려다가 말을 삼켰다. 집사가 사라진 것도, 카지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도 내 탓이 맞았으나 나는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리에 앉은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며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집사가 도망간 것과 카지노가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을 쫓아낸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곤 명령조로 말했다.

    “더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고 이 저택에서 나가.”

    백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 뿐,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와 이혼하고 싶어 하고, 나는 이혼하고 싶지 않아. 법원에서 싸우면 당신도 나도 무척 괴롭고 귀찮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그동안 백작이 카를라와 나에게 저지른 짓들의 증거를 가지고 법원에 가 이혼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사이 일어날 일들은 상상만 해도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그러니 내기를 하지.”

    “내기를?”

    그는 초조한 듯 양손을 맞대고 비볐다.

    “그래, 뭐든 좋으니 내기를 해서 당신이 이기면 이혼해 주지. 대신 내가 이기면 이혼은 없었던 거로 하고, 저택도 내게 돌려줘야 해. 카지노 출입 금지도 풀고.”

    백작의 말을 받아들여 보았자 하등 좋을 게 없었다. 내기 따위를 하지 않아도 나는 그와 이혼할 수 있었다. 백작은 속임수를 쓰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데다가 나는 그보다 실력이 한참 떨어졌다. 귀찮은 짓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수상쩍은 내기를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당연히 내기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쉽게 대답하지 않자 백작이 조급하게 덧붙였다.

    “속임수를 써도 내가 눈치채지 못하면 없었던 것으로 해 주지.”

    노골적인 말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내가 속임수를 써도 된다는 것은 그도 속임수를 쓰겠다는 말과 같았다. 순수한 실력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없으나, 속임수를 쓰는 내기라면 나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덧붙여서 당신이 지면 앞으로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백작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좋아, 종류는 당신이 고르도록 해.”

    “카드 게임이 좋겠어. 포커로 할까.”

    “그럼 지금 바로 준비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거즈가 덕지덕지 붙은 손에 백작의 시선이 쏠렸다.

    “지금 바로 할 수는 없어. 보다시피 손이 이 모양이라. 그러니 내 손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

    찻잔을 들어 올리고 옷을 갈아입는 등의 큰 동작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얇은 카드를 움직이거나 쥐는 등의 세세한 동작은 아직 어려웠다. 불편한 채로 카드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내가 속임수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백작이 툴툴거리며 항의했다.

    “뭐? 그럼 그동안 카지노는 어떻게 하란 말이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사정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백작이 고통스러워하는 기간이 늘어나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기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저택에서 억지로 끌어낸 다음 법정에 서도 그만이야. 그래서, 기다리겠나? 아니면 그냥 법정에서 보겠나?”

    백작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았으나 쉽게 주먹을 들거나 위협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지.”

    그러곤 패배한 장수처럼 비틀비틀 식당을 나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 * *

    내기를 요청한 이후로 백작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방에 박혀 카드 연습을 하느라 하녀들을 괴롭히지도 않아 큰 소리가 날 일도 없었다.

    상처가 깊지 않은 덕분에 벨도 빠르게 회복했다. 그녀는 흔적 없이 말끔해진 목을 보여 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이네.”

    “네, 마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이에요.”

    벨은 이전보다 씩씩하게 일을 처리했다. 나는 그녀에게 저택의 일을 몇 가지 일임해 보았다. 실수가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으나, 벨은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차를 잘 끓였다.

    “네가 돌아와서 기뻐.”

    벨은 거즈를 갈아 주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없는 동안 리자가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닐지 걱정했다.

    “그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차 맛이 끔찍한 것 빼고는 괜찮았어.”

    나는 새로운 거즈가 붙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있었고, 통증이나 둔한 감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카드를 쥐어도 될 것 같았다.

    “벨, 카드 연습 상대 좀 해 줄래?”

    “카드요?”

    “응, 쓸 데가 있어서.”

    주방 하녀들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건 벨의 장점이었다. 벨은 금방 카드를 가져왔다. 나는 이번에는 리자를 불렀다.

    “리자, 와서 카드 좀 나누렴.”

    “네!”

    리자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곤 나와 벨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가락이 둔해져서 그런지 연신 카드를 놓치긴 했지만, 그럭저럭 게임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몇 판을 진행하자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후로는 속임수를 적절히 섞어 가며 벨을 상대했다. 승률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둔해진 감각을 깨우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백작이 무슨 더러운 수를 들고 올지 모르니 나도 보험을 들어 놔야지.’

    여차할 땐 리자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내가 속임수를 써도 된다는 건, 딜러를 매수해도 된다는 거니까.

    ‘리자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백작과 빨리 이혼하려면 이게 제일이야.’

    나는 종종 벨과 리자, 테오도르에게 카드 게임의 상대를 부탁했다. 여전히 승률은 변하지 않았으나 손가락의 감각은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조만간 상처가 완전히 나아 거즈를 떼어도 될 것 같았다. 상처가 낫기 전까지 확실히 이기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식사하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속임수를 생각하는 데 매달렸다.

    ‘무슨 속임수를 써야 이길 수 있지?’

    리자라는 최강의 패가 내 손에 있기는 하지만, 그녀를 회유하기 전에 쓸 만한 속임수를 생각해 내야 했다. 리자를 구슬리는 데 실패할 수도 있으니 만의 하나를 생각해 두고 싶었다.

    나는 리자에게 여러 속임수를 배웠다. 백작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손에서 손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리자가 쓰는 속임수를 전부 할 수 있게 되면 백작이 무슨 수를 쓰든 무섭지 않을 거야.’

    연습을 위해 정신없이 카드를 섞고 나누기를 반복하는데, 테오도르가 불쑥 말을 걸었다.

    “카를라 님, 밤이 늦었습니다. 내일 다시 하시죠.”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속임수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네요. 곧 상처가 다 나을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했나 봐요.”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적당히 하고 있어요.”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카드를 정리하곤 벨과 리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희도 이만 가 봐. 수고했어.”

    빠르게 방을 나선 벨과 달리 리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하니? 가도 된다니까.”

    내가 재촉해도 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마, 마님, 드릴, 말씀이,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리자는 평소와 달리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양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얼마나 강하게 쥐었던지 손가락 끝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덜덜 떨고 있었다.

    “응, 뭐니?”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리자는 몇 번이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끈기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배, 백작님께서 독을 구하고 계세요.”

    리자의 입술은 잇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백작이 독을 구하고 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백작이 시가를 구하는 걸 말하는 건가? 아편이 독이나 다름없다는 걸 리자가 어떻게 알았지?’

    머리가 복잡했다.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리자가 말했다.

    “백작님은 마님을 죽일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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