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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2)화 (82/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2화

    테오도르는 치료를 받는 내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사가 눈치를 볼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치료를 마쳤다.

    손바닥에 두꺼운 거즈가 치덕치덕 붙었다. 거추장스러웠으나 생각보다 더 깊게 손톱이 파고든 탓에 당분간은 거즈를 붙이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정작 다친 건 다른 사람인데 내가 환자처럼 하고 다니자니 민망했다.

    눈에 띄게 거즈를 붙이고 있자니 파티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남들의 입방아에 쓸데없이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저택에 박혀 카를라가 남긴 흔적을 다시 한번 훑기로 했다.

    ‘그동안 집사를 대신할 사람도 고용해야 하고.’

    우발적으로 집사를 쫓아내었으니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목을 다친 벨에게 계속 일을 시킬 수 없어 당분간은 꼼짝없이 내가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벨은 유급 휴가를 가면서도 내내 나를 걱정했다.

    “마님, 차를 타 올까요?”

    반대로 리자는 기합이 들어갔다. 벨이 없는 지금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됐어. 다음 서류로 넘어가자.”

    그러나 들뜨기만 할 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가 서류를 보고 있는 동안 차를 타 오거나, 종이와 잉크를 보충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을 했다.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게 거슬리기는 했으나 벨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녀에게 대부분의 일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계속 보니?”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가 꽤 지적인 호기심이 많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리자는 호기심이 강해 이것저것을 곧잘 물어보았다.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지는 못해도 잊지는 않았다. 필기가 서투르기는 했으나 손재주가 필요한 곳에서는 퍽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차를 타는 솜씨는 엉망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숫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숫자가 이번에 사들인 요리 재료의 금액이고, 옆에 있는 게 예산이야. 예산에서 사용한 금액을 뺀 나머지 금액을 다음 예산으로 잡은 거고.”

    “아, 그럼 이 밑에 적힌 게 이번 주 예산인가요?”

    “그래. 불러 줄 테니까 적어.”

    리자는 펜을 쥐고 내가 불러 주는 숫자를 그대로 써 내려갔다. 손을 쓸 수 없는 나 대신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자면 묘하게 귀여운 마음이 들었다.

    ‘머리가 꽃밭이 아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혀를 차며 리자가 건넨 종이를 다시 훑어보았다. 글자가 예쁘지 않다는 걸 빼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큰일을 해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 이제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아니, 차나 끓여 와. 아, 네가 끓이지는 말고.”

    “네!”

    리자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문을 나섰다.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적어도 한참 동안 주방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 카를라의 일기장을 꺼냈다. 꽤 오랜만에 열어보는 것이었다. 다시 일기장을 훑어보면 뭔가 도움이 될 것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읽어 봐도 별 내용은 없어.’

    내가 아는 내용 그대로였다. 꾹꾹 눌러 쓴 글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넘겼다. 손가락 끝으로만 넘기다 보니 금방 마지막 페이지에 닿았다.

    [차라리 내가 그를 증오했다면, 그의 피로 내 손과 칼을 적실 수 있었다면! 내게는 그의 부도덕을 고발할 혀도, 그를 찌를 손도 없다.]

    불쌍한 카를라. 나는 그녀가 모아 왔던 불륜의 증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백작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카를라는 복수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지. 내가 카를라의 몸에 들어와서 복수했으니 반은 카를라가 복수한 셈 아닌가?’

    나는 다시 일기장을 펼쳐 문장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차라리 내가 그를 증오했다면?’

    신이 보여 주었던 글자가 수면 위로 떠 오르듯 눈앞에 떠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원했기 때문에.]

    종이 위에 새겨지듯 나타난 글자. 카를라가 원했기 때문에 내가 이 세계에 왔다는 말이었다.

    ‘카를라가 원한 게 자신이 백작을 싫어하게 되는 거였다면.’

    머릿속에서 퍼즐이 딱, 하고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를라가 원한 것은 자신이 다른 세계로 가거나, 내가 이 세계로 오는 게 아니라 그저 백작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괴담이 생각났다.

    악마와 거래할 때는 주어와 목적어를 똑바로 말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최악의 방향으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고 말이다.

    ‘이 세계의 신은 글자에 헌신한다.’

    유모가 했던 잔소리도 떠올랐다. 모든 글은 신이 읽을 수 있으니 한 글자를 적더라도 조심히 적어야 한다고.

    ‘만약 카를라의 일기장을 신이 읽었다면, 그리고 무슨 변덕이었는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카를라가 백작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 어려우므로 영혼을 바꿔 다른 사람을 불러온 것이라면 말이 되었다. 내가 카를라의 몸에 들어온 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인 것이다. 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신에 대한 원망이 솟아올랐다.

    ‘신이 뭐 이래?’

    짜증으로 일기장을 던질 뻔했으나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은 진정하자.’

    다시 일기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신과 했던 필담을 떠올렸다.

    첫째,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카를라가 원했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돌아가지 못한다. 셋째,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역시 카를라 때문이다.

    내가 만든 가설, 즉 카를라의 일기장 때문에 신이 나를 불러온 것이라면 첫 번째는 이해가 간다. 카를라가 원한 것은 자신이 백작을 싫어하는 것이고,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집어넣었다. 어쨌든 육체는 카를라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지막 대답이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무시한다고 치더라도, 내가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카를라 때문이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를라는 나를 몰라. 나도 카를라를 모르고. 그러니까 카를라가 나를 돌려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어.’

    턱을 괴고 한참을 생각해도 그럴싸한 가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동안 리자가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차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찻잔을 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으로 차의 풋내가 밀려 들어왔다. 차마 먹기 힘든 역겨운 맛이었다.

    “리자, 내가 차는 네가 타지 말라고 말했지 않니?”

    “그, 그러시긴 했는데요…….”

    차마 차를 뱉지 못해 억지로 삼키고 묻자, 리자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작님이 또 식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주방 하녀들에게 화를 내고 계셔서요…….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마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았어요.”

    요컨대 백작이 난동을 피워 차를 끓일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생각을 너무 깊게 하고 있어 백작이 난동을 피우는 걸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음부터는 내게 다시 물으러 와.”

    나는 한숨을 뱉곤 찻잔을 멀리 밀어놓았다. 더 심하게 다그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차는 다시 끓여 오고.”

    “네!”

    쉽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리자는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머리가 꽃밭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찻잔을 챙겨 나가는 리자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 *

    백작은 이전처럼 크게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으나, 종종 하녀들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하녀들에게 최대한 그와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언질을 주었으나 같은 저택에 있는 이상 어떻게든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쫓아내야겠어.’

    백작을 쫓아내고 나서 집에 돌아갈 방법을 느긋하게 찾아볼 생각이었다. 백작이 저택에 있으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신경이 쏠려 짜증이 났다.

    왕이 내린 벌이 끝나는 날, 백작은 새벽같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이혼 합의서를 내밀기도 전에 도망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금단 증상을 참을 수 없으니 카지노로 갔겠지.’

    백작의 행동은 뻔했다. 근신이 풀렸으니 다른 귀족들의 저택을 전전하기보다 카지노에 가 아편을 찾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백작은 카지노에 출입할 수 없었다.

    내가 카지노에 백작의 출입 금지를 명했기 때문이었다. 대외적인 이유는 그동안 발행한 어음을 제때 다 갚지 않아서라고 둘러대었으나 눈치 빠른 귀족들은 나와 백작이 완전히 척을 졌음을 알아차렸다. 백작이 왕의 생일 연회에서 저질렀던 일까지 끌려 나와, 수도의 찻집에서는 끝없이 그의 험담이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는 문전박대당한 분노로 씩씩거리며 나를 찾았다. 집사가 사라진 탓에 그는 식당까지 직접 찾아와 고함을 질러야 했다. 집사가 왜 사라졌는지 모르는 백작은 아직도 내게 뻔뻔스럽게 굴었다.

    “내가 왜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는 거야! 당장 출입 금지를 풀어!”

    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럼 이혼 합의서에 서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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