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1화
“저, 저 문양이 새겨진 밀랍을 준 여자가 있어! 우,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이름도 못 들었다고!”
나는 그의 몸을 발로 찼다. 얼마나 강하게 찼던지 몸이 휘청거렸다. 때마침 테오도르가 어깨를 잡아 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끄아악!”
그저 분풀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래도 한 대 때리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밀랍을 건넨 여자라면 집사겠지. 밀랍이라면 봉랍을 멋대로 떼어 낸 건가? 아니면 백작이 줬을까. 내 방의 열쇠를 백작에게 멋대로 건넸을 때 쫓아내야 했어.’
나는 이를 갈며 강도들을 훑어보았다. 한국이었다면 경찰을 불러 법의 심판을 받게 했겠지만, 이 세계의 법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발치에 널브러진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 경, 이런 경우엔 제가 어디까지 저들을 처벌할 수 있나요?”
그가 즉답했다.
“즉시 목숨을 거두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허둥지둥 일어났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사, 살려 주십쇼! 도, 돈에 눈이 멀어서 그랬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바닥에 구르다시피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세상 모든 게 나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카를라가 신에게 뭘 빌었는지도 모르겠고, 왜 집사가 백작에게 붙어서 날 괴롭히려고 안달이 난 건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날카롭게 뱉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미, 믿어 주십쇼. 저, 정말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발을 들어 올리자 테오도르가 몸을 비틀어 내 앞을 막았다.
“카를라 님, 흥분해 계십니다.”
“흥분 안 했어요.”
“손이 떨리고 있습니다.”
테오도르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펼치니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를 보던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다시 강도들을 천천히 훑어보니, 그들은 그리 전문적인 집단이 아닌 것 같았다. 깊은 상처가 아닌데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전문적인 강도였으면 벌써 도망가지 않았을까.’
밝은 낮에 마차를 습격한 것만 해도 그랬다. 더 전문적인 사람들이었다면 테오도르가 얼마나 강한지 알 테니 덤비지도 않았을 테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풀어 주는 대신 그쪽이 해야 할 게 있는데.”
그들은 무슨 말을 듣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테니 정말 쓰기 딱 좋은 말이었다.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야 했다. 나는 입가를 끌어올렸다.
* * *
다행히 마부는 팔꿈치에 멍이 들었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덜덜 떨고 있다가 상황이 끝나자 마부석으로 돌아왔다.
벨은 목덜미에 손가락 한 마디가 넘는 상처를 입었다. 한 놈 정도는 본보기로 똑같이 만들어 줬어야 했다고 이를 갈았지만, 이미 놓아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집사는 나를 보고 죽은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명령을 내렸다.
“집사,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와.”
“네, 마님.”
“그대가 직접 다녀와야 할 거야. 이유는 알겠지.”
집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녀도 얼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옷에 피가 묻은 벨과 테오도르를 밖으로 보낼 수도 없고, 다른 하녀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일을 크게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니 집사가 직접 다녀와야 했다.
집사는 허둥지둥 웃옷을 챙겼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자신이 사주한 게 들켰는지 아닌지조차 파악 못하면서 큰일을 벌인 게 우스웠다.
벨의 옷깃과 목덜미에는 미처 닦지 못한 피가 남아 있었다. 나는 벨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 깨끗한 손수건으로 다친 곳 주변을 닦아 주었다. 리자는 그 모습을 보고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하렴.”
나는 리자에게 핀잔을 줬다가 어르듯 다시 말했다.
“리자, 의사를 불러와. 길은 마부가 알고 있을 거야.”
“네? 아까 집사님이 부르러 갔는데 또 부르나요?”
리자가 벨을 바라보았다. 내가 시키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녀는 종종 벨을 보며 도움을 구하곤 했다. 그러나 벨은 이번에는 리자를 구박하며 알려 주는 대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얼른. 상처가 덧나면 큰일이잖니.”
“네, 네!”
거듭 재촉하자 리자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마님.”
리자가 문을 나서자 벨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굴리다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나는 그녀가 왜 사과하는지 몰라 의아했다. 벨은 피해자였다. 내 옆에 있다가 사건에 휘말렸을 뿐,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혹시 집사가 아니라 벨이 강도를 사주한 걸까.
‘그럴 리가 없지.’
벨에겐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을뿐더러, 내가 없어져 봤자 그녀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고개만 기울이고 있자 벨의 뺨 아래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마님께서 집사님을 잘 감시하라고 절 보내셨는데,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어요. 입이 몇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벨을 집사에게 붙인 건 그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업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엉엉 울고 있는 벨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짐짓 무게를 잡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게 어떻게 네 탓이겠니.”
“죄송해요, 마님.”
“죄송할 것 없어.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니. 목이 아플 테니 더 말하지 마.”
벨은 쉽게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곧 의사가 도착했다. 리자와 함께였다. 벨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다른 말 없이 의사에게 벨의 처치를 부탁했다.
아마 집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강도들에게 명령한 것은 단 하나였다. 저택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문장을 보여 줬다는 여자를 발견하면 협박할 것.
‘혹시나 집사가 아닐 수도 있어서 리자도 보냈는데, 결국 집사가 맞았나 보군.’
다치게 하거나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귀족을 살해하려 한 자는 즉시 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다시 저택에 돌아오는 순간 내게 하려던 짓을 똑같이 해 주겠다고 전하라고 했으니,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이쪽의 처치는 끝났습니다.”
벨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칼에 베인 것이 문제라고 했다. 의사는 쇠 독이 오르지 않도록 거즈를 자주 갈아 주어야 한다며 몇 가지 주의점을 말해 주었다. 그는 치맛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보곤 혹시 나도 다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이건 내 피가 아니니 괜찮네.”
나는 고개를 젓곤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 나를 감싸다가 상처를 입었는데, 오늘 또 그런 일이 생겼으니 몸 상태가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보다 테오도르 경의 몸 상태를 봐주지 않겠나. 이전에 다친 것이 덧나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저는 괜찮습니다.”
테오도르는 사양했으나 나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폐하께 제가 뵐 낯이 없어서 그래요.”
왕을 들먹이자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얌전히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다친 곳이 전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등의 멍은 거의 흐려져 가니 당분간 크게 움직이지만 않으시면 될 겁니다.”
“제대로 살핀 게 맞는가?”
“물론입니다. 성기사님은 다친 곳 하나 없이 아주 건강하십니다. 크게 움직이셨다니 근육통이 오실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외에는 걱정하실 부분은 없으십니다.”
나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격하게 싸웠는데 다친 곳 하나 없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눈썹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 저는 그리 약한 기사가 아닙니다.”
그가 약해 보였다는 말로 들렸을까 싶어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물론이에요. 테오도르 경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도 상처 하나 없다는 것이 놀라워서요.”
테오도르는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 틈을 타 나는 의사를 돌려보내려 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가느라 수고 많았네. 왕진비는 바로 지불하도록 하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테오도르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손바닥을 살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느라 붉게 부은 곳 위로 손톱이 파고들어 엉망이 된 손바닥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카를라 님도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에 얼굴이 붉어졌다. 연고를 넉넉하게 받아 바르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의사는 큰 상처가 아니라도 곪을 수 있다며 잔소리를 했다. 그가 손바닥 위에 소독약을 쏟아붓자 쓸린 부분이 있는지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묻자, 테오도르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