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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9)화 (7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9화

    카를라를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피데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화장대 뒤는? 종이 한두 장은 붙일 수 있을걸. 거긴 손이 닿지 않으니까 숨겨 놓기 쉽지 않을까?”

    “그럴싸한데.”

    나와 피데스가 화장대에 달라붙자 테오도르가 우리를 막았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두 명이 붙어 옮기는 것보다는 효율적일 것 같아 비켜 주자, 그는 화장대 한쪽 옆을 잡고 뒷면을 보기 쉽게 옮겨 주었다. 화장대 뒤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없네.”

    내 실망스러운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다시 화장대를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카를라가 침대 밑에 일기장을 숨겨 놨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방에 숨겨진 공간이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카를라의 방 곳곳을 뒤졌다. 영화처럼 벽 뒤에 숨겨진 통로가 있을까 싶어 훑어보기도 했으나, 허탕이었다. 처음부터 바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 같아 조금 즐겁기까지 했다.

    “다시 생각해 봐. 어디에 뭘 숨겼는지 정말 짐작 가는 곳 없어?”

    피데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보물찾기에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뭘 숨겼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감이 안 잡혀. 내 방에 없으니 서재에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집무실에 숨겨 놨을지도 모르겠다.”

    “집무실?”

    “그래, 후계자 교육을 할 때는 늘 집무실로 불렀잖아. 아버지가 쓰는 공간이긴 하지만, 평소엔 쓰는 것만 쓰니까 뭘 숨겨 놓기엔 제격이지 않아?”

    “그렇네.”

    서재와 집무실, 둘 중 어디를 먼저 가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유모와 벨이 양손에 큼지막한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방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 쟁반을 두고 접시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접시에는 머핀뿐만 아니라 스콘이며 쿠키, 잘게 썬 과일까지 온갖 주전부리가 담겨 있었다. 유모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쌓아 놓았다.

    “이게 다 뭐니?”

    벨을 보며 물었으나 대답은 유모에게서 나왔다.

    “뭐긴요. 아가씨 좋아하시는 것들이죠. 오랜만에 오셨는데 머핀만 드시면 서운해하실 것 같아 힘 좀 썼어요.”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는 바람에 무어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요. 자, 자. 아가씨. 식기 전에 드세요. 따끈따끈하게 드실 수 있게 막 구운 것들로 가져왔어요.”

    유모의 강요 아닌 강요로 피데스와 나, 그리고 테오도르까지 테이블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간식을 해치워야 했다. 유모는 내가 간식거리를 입에 넣을 때마다 무척 뿌듯한 얼굴을 했다.

    피데스가 큼직한 스콘에 잼을 바르며 말했다.

    “내가 집무실을 확인해 볼 테니 언니는 서재에 가 봐.”

    그녀의 말은 퍽 합리적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하나 집었다. 공작의 집무실을 함부로 뒤질 수도 없거니와, 남의 업무 공간을 헤집는 게 영 꺼림칙하던 참이었다.

    “아가씨, 찾으시는 게 있으세요?”

    “응.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내가 더 대답하지 않자 유모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더 캐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게 저녁 식사로 무엇이 좋으냐 묻고는 얼른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벨에게 뒷정리를 명령하고는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이걸 다 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내가 카를라라면 아무도 안 건드는 책을 선택했을 거야.’

    손때가 많이 묻은 책은 건너뛰고 비교적 손이 닿지 않는 책을 고르기로 했다. 주로 역사책이나 두꺼운 사전이었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책을 펄럭펄럭 넘겼다. 걸리는 종이는커녕 낙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답답했다. 머리를 책장에 기대고 한숨을 쉬어도 갑갑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휘저어 필요한 걸 건져 내라는 말을 들었어도 이것보다 더 갑갑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책을 꺼내고 펼치고 쌓아 두었다. 테오도르는 간간이 쌓아 놓은 책을 다시 정리하고, 위쪽에 꽂힌 책을 꺼내 훑어보았다.

    나는 책을 훑으면서도 간간이 그를 힐끔거렸다. 진지한 얼굴로 책을 내려다보는 테오도르의 단정한 옆 모습은 계속 바라보고 싶을 정도로 고왔다.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얼른 얼굴을 책에 처박았다.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내가 책 안 보고 훔쳐보던 게 들켰나?’

    의미 없이 책 한 권을 다 훑을 때까지 테오도르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연히 바라본 척,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직전의 나처럼 책에 코를 박고 허둥지둥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뭐야, 귀엽게.’

    나는 숨죽여 웃었다. 그의 귀여운 행동을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내가 왜 웃는지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 * *

    책장 두 개를 훑었는데도 수확이 전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책만 훑으려니 눈이 따끔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유모가 우리를 불렀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응.”

    그녀는 급하게 준비해 차린 게 부족하다고 몇 번씩 강조했으나, 정작 식당에 도착해서 본 식탁은 어마어마했다. 이전에 받았던 대접보다 더 융숭한 것 같았다.

    피데스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유모가 내 뒤에 서 있는 테오도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성기사님 자리는 아가씨 옆이에요.”

    “저는 호위 기사니, 식사는 후에 사용인분들과 함께하겠습니다.”

    테오도르가 사양하자, 피데스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이 앉지 않으면 신실한 우리 유모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을 거야.”

    유모는 말 그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신앙이 깊은 공작가의 사람이라 그런지 성기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테오도르가 잘 먹고 다니면 나쁠 것이 없었으므로 말을 보태었다.

    “그래요, 테오도르 경. 마음 약한 유모를 위해서라도 함께 식사해 주세요.”

    테오도르는 정말 그래도 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저도 테오도르 경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요.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잖아요.”

    그제야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옆에 자리를 잡자, 유모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식기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피데스는 집무실에서도 별 수확이 없었다고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 또한 책장 두 개를 훑었지만 찾은 게 없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언니가 기억해 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기억이 나면 이런 고생 안 하지.”

    우리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유모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식사 시중을 들었다. 벨은 그녀의 적극성에 놀란 눈치였으나, 능숙하게 자리를 비켜 테오도르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유모가 원래도 카를라에게 이렇게 굴었나 싶어 피데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나를 볼 뿐, 유모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카를라가 유모에게 종이를 맡겼을 수도 있어. 일기장 같은 거라면 숨기기도 쉬우니까.’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유모를 따로 불러내었다. 따로 불러내었다고 해도 주방으로 간 것뿐이었으나, 유모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본론을 꺼낼 수는 없어 말을 골라야 했다. 카를라를 업어 키웠다는 유모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이전에 만났을 땐 말할 겨를도 없었잖아.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게 마음에 걸렸어. 혹시 섭섭했어?”

    나는 입가를 끌어올려 보였다. 유모의 주름이 가득한 눈가에 애틋함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녀를 구워삶아야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전에 유모가 대답했다.

    “섭섭하다니요. 그럴 리가요. 아가씨가 건강하신 걸 확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데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싫다고 우시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른이 되셨군요.”

    카를라가 후계자 교육을 싫어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유모의 말은 단순히 그녀가 힘들어했다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탄탄하게 뻗어 있던 금빛 미래를 발로 차고 백작과 결혼한 게 아니었나?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야?”

    유모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척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공작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시길래 이 유모가 얼마나 걱정을 했지 몰라요.”

    어쩌면 카를라가 나를 불러온 것과 공작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게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카를라에게 빙의하면 공작이 되지 않아도 되니까.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이 공작이 되면 좋겠다던가, 아니면 그 비슷한 말을 적어 둔 걸 본 적이 있어?”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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