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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8)화 (78/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8화

    다행히도 벨은 신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는지 부은 얼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나를 당장이라도 쓰러질 사람 취급했다.

    “마님, 어지럽지는 않으세요?”

    “지금은 괜찮아.”

    그녀는 팔이 저리지는 않으냐, 머리가 어지럽거나 이명이 들리지는 않느냐를 몇 번이나 되물었다. 나는 그녀의 잔소리를 피하려 아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 *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카를라가 남긴 모든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를라가 손을 대었을 것 같은 곳은 어디든 훑어보았다. 남아 있는 편지도 몇 번이나 뒤지고, 책 사이에도 혹시 숨겨 놓은 종이가 있을까 싶어 서재를 샅샅이 뒤졌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벨은 내가 무슨 계시를 받은 줄 알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영문을 모르는 리자만 옆을 기웃거렸다.

    ‘백작가에 오기 전에 빌었을지도 몰라.’

    나는 서재를 빙글빙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카를라의 소원이 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어디서든 카를라가 뭔가를 빌었을 만한 종이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카를라가 신에게 뭘 빌었다면, 그 종이를 놓아둘 곳이 어딜까. 안전한 곳, 남의 손이 쉽게 닿지 않는 곳, 심지어 자기 자신도 쉽게 찾을 수 없었을 곳.’

    바로 두 곳이 떠올랐다. 공작가와 왕의 곁. 카를라는 남이 찾기 어려운 방식으로 제 마음을 숨겨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연이 끊기며 종이를 되찾을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으나 나는 이미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주변에 서 있던 벨에게 명령했다.

    “벨, 편지를 써야겠구나. 종이를, 아니, 외출 준비를 해야겠어.”

    편지를 쓰는 시간도 아까웠다. 당장 공작가로 가 카를라의 방을 뒤져 보고 싶었다.

    “마님, 외출하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에요.”

    외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니 급하다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어떠냐며 벨이 만류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하늘은 붉었고, 등불이 없어도 앞이 보일 정도의 밝기였다.

    “아직 하늘이 저렇게 밝잖아. 괜찮아.”

    내가 고집을 부리자 벨과 리자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를 말릴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는 듯. 나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쳐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공작가로 갈 거예요.”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건 예의에 어긋납니다.”

    테오도르 또한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당황하시긴 하겠지만, 그거야 사과드리면 될 일이고요.”

    “밤중에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우리 마부는 능숙하니 괜찮아요.”

    우리는 몇 번을 더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가 이래서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저래서 된다고 하는 식이었다.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리자는 뒷걸음질을 쳐 서재 문에 딱 달라붙었다.

    “왜 그렇게 날 막는 거죠?”

    테오도르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가 짜증을 내거나, 혹은 쓸모없는 소모전을 그만두겠다고 항복할 줄 알았다.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했다. 그의 뺨에 노을빛이 드리웠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힘든 일을 겪으셨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다 카를라 님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저는 겁이 납니다.”

    테오도르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올곧은 눈빛에는 그 어떤 거짓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걱정된다는 말에 차마 당장 공작가로 가고 싶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식자 내가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는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변명하는 대신 공작가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공작가에 며칠 묵고 싶으니 초대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벨은 그 편지를 받아 집사에게 전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피데스 소공작의 초대를 받는 형식을 빌려 공작가에 방문하기로 했다. 이틀 내내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집사는 탐탁잖은 얼굴을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의 저택은 완벽히 정비된 그대로, 정원에 핀 꽃의 색만 바뀌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마차에서 내린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유모였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휴, 우리 아가씨 핼쑥해지신 것 좀 봐요.”

    “그래?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여전히 우아하시지요. 그냥 이 유모가 챙겨 드리지 못해 속상한 것뿐이에요.”

    유모는 나를 붙들고 전담 하녀가 똑바로 일하는지를 캐물었다. 고개를 젓기라도 하면 벨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벨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모, 언니를 너무 괴롭히지 마.”

    “너무 오랜만에 뵈어서 그만, 아이고 아가씨, 얼른 들어가셔요.”

    때마침 피데스 소공작이 나를 구해 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유모에게서 떨어졌다. 피데스는 꼭 집사처럼 나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바로 방으로 가실 겁니까?”

    “부모님께 먼저 인사부터 드리고요.”

    “두 분은 빠질 수 없는 모임이 있어 일찍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맞이 인사를 못 하여 미안하다고 전하라셨어요.”

    “어머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언니라면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았습니다. 방으로 가시죠.”

    종종걸음을 치며 우리 뒤를 따라오는 유모에게 소공작이 넌지시 말했다.

    “유모, 간식을 좀 챙겨 줘.”

    “예, 소공작님. 아가씨, 스콘을 준비할까요? 아니면 바삭바삭한 쿠키를 구울까요?”

    “유모가 해 준 거면 뭐든 좋아.”

    성의 없는 대답에도 유모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잼을 듬뿍 넣은 머핀이 좋겠어요.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블루베리 잼을 넣어야겠어요.”

    그녀는 분주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머뭇거리는 벨에게 말했다.

    “벨, 너도 가서 도우렴.”

    “네, 마님.”

    두 명의 방해꾼을 치우고 나서야 소공작이 말을 놓았다.

    “갑자기 오겠다고 하길래 큰일이 있는 줄 알고 놀랐잖아.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뭘 찾을 게 있어서.”

    “뭘 찾는데?”

    “그냥 찾을 게 있어.”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사실 카를라가 아니라 빙의한 사람인데, 카를라가 신에게 무슨 소원을 빌어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찾으려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공작가가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카를라의 몸을 빼앗은 악령 취급을 할지도 모른다.

    “뭔지 안 가르쳐 주면 안 도와줄 거야.”

    그녀가 카를라의 방문을 열며 투덜거렸다. 이전과 다름없이 반듯하게 정리된 방을 훑어보았다. 방은 그리 작지 않았으나 물건이 많지 않아 테오도르의 힘까지 빌리면 한나절 안에는 방을 전부 뒤져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카를라의 방에 과연 내가 찾는 게 있을지 막막해졌다.

    카를라가 자신의 방이 아니라 저택 다른 곳에 무언가를 숨겼다면 내가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언니, 정말 나한테도 말 못 해 줘?”

    피데스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기대었다. 그녀의 새카만 눈이 나를 올려다보며 부자연스럽게 깜빡거렸다. 아무 말이나 둘러대고 그녀를 떼어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지워 버렸다.

    ‘계속 시치미를 떼면 소공작은 더 파고들 거야.’

    피데스가 나를 방해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조르듯 칭얼거렸다.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심각한 일이라면 무조건 들어야겠어.”

    피데스는 내가 말해 줄 때까지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운 좋게 사제들이 쓰는 종이를 얻어서 신께 질문할 기회가 있었어.”

    피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을 말할 때는 사실을 한 스푼 섞어야 쉽게 들키지 않는다.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답을 얻으려다가 수수께끼만 얻고 말았지 뭐니.”

    “무슨 수수께끼?”

    “내가 원한 것이 이루어졌다는데, 정작 그게 뭔지 모르겠어.”

    정확히는 카를라가 원한 것이 이루어졌는데, 나는 카를라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무슨 말이야, 그게.”

    피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알쏭달쏭한 거지. 내가 뭘 원했길래 그게 이루어졌다는 걸까?”

    나는 피식 웃었다. 피데스는 이제 내가 ‘왜’ 무언가를 찾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신께서 답을 주었다면 글로 써 놓았을 가능성이 크잖아. 예전에 신께 기도했던 글을 찾아보려고 집에 온 거야. 뭐라도 남아 있을까 해서.”

    “그렇구나. 언니도 뭘 찾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거지?”

    피데스 소공작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큰 결심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웃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라면 중요한 물건은 어디에 숨겨 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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