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6)화 (7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6화

    테오도르는 약속했던 대로 나를 데리러 왔다. 문을 열자마자 테오도르의 등이 아닌 얼굴이 보이는 건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몸을 굳히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나는 테오도르를 잠시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는 평소 입는 제복이 아니라 다른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지만 사복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별 차이가 없었으나, 멋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테오도르 경도 멋지시네요.”

    “감사합니다.”

    데이트의 대외적 명목은 백작의 쾌유를 빌기 위해서였다. 신전에는 하녀들을 모두 데려가야 하지만, 나는 얼굴에 멍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리자를 떼어놓았다.

    “마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리자는 공손하게 인사했으나 저도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빠르게 테오도르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마부는 자신이 얼마나 꼼꼼하게 마차를 점검했는지를 연신 떠들어 대었다. 이전과 같은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마부의 허풍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타시죠.”

    테오도르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수리했다는 마차는 훨씬 깔끔해져 있었는데, 벽에 두껍고 푹신한 천을 덧댄 탓에 자리는 전보다 좁아졌다.

    자리가 좁아졌다는 말은, 테오도르의 무릎이 내 무릎에 닿는 일이 잦아졌다는 말과 같았다. 길이 조금만 험해져도 내 무릎이 그의 무릎을 스쳤다. 다리에 힘을 줘도 마차가 덜컹거리면 발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테오도르의 정강이를 몇 번을 찼는지, 나는 쩔쩔매며 그에게 사과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태연하게 자세를 잡는 벨이 부러울 정도였다.

    “아프지 않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런, 죄송해요. 테오도르 경의 다리를 찬 게 방금까지 정확히 다섯 번째예요.”

    벨은 착실한 하녀답게 주인의 추태를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덕분에 테오도르의 표정은 나에게만 보였는데, 그는 방금까지 실컷 정강이를 맞은 사람답지 않게 활짝 웃고 있었다.

    “제가 카를라 님께 다섯 번 닿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때마침 마차가 덜컹거려 다시 내 다리가 그의 다리를 때렸지만, 이번에는 차마 사과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섯 번째 사과를 마지막으로 신전에 도착했다. 이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가까운 곳에 마차를 세운 덕분에 오래 걷지 않아도 되었다.

    ‘이전에는 사람이 이보다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신전은 고요했다.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긴 했으나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싶었으나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주변을 자꾸 둘러보자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수확철에는 신전에 방문객이 줄어듭니다. 아무래도 일이 바빠지면 신앙은 멀어지는 법이라.”

    생각을 읽힌 것 같아 그를 바라보자 의아한 표정이 되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표정을 읽은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확 시기가 되면 직접 일하는 사람도, 보고를 받는 사람도 바빠지기 마련이었다. 파티 초대장도 줄어들고 있었으니 신전이 한산한 것도 이해가 갔다.

    오히려 좋았다. 시선이 없으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좋았다. 분명 테오도르에게 안내를 받은 적 있던 곳들이었으나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진짜 도서관 같단 말이야.’

    느긋하게 내부를 훑어보았다. 신전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이 쌓여 있었는데, 그저 훑어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의 양이었다.

    내가 책장을 훑어보는 동안 테오도르는 사제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그에게 깍듯했다.

    ‘하긴, 입을 열지 않아도 테오도르는 뭔가 성스러운 분위기가 나니까.’

    나는 책장 너머로 그를 훔쳐보았다. 좋아하던 아이를 훔쳐보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테오도르의 나긋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내게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여간 예사로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사제들이 쓰는 종이를 얻어 왔습니다.”

    테오도르는 생글거리며 내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갑자기 웬 종이.’

    뜬금없는 선물에 종이를 훑어보았다. 질 좋은 종이 가장자리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잉크로 꾹꾹 눌러 쓴 글자가 박혀 있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응답해 주소서?”

    소리를 내 글자를 읽자 테오도르가 설명했다.

    “사제들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쓰는 종이입니다. 위대한 분과 소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 쉽게 내주려고 하지 않더군요.”

    요컨대 구하기 어려운 종이라는 뜻이었다. 이전에 테오도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사제들은 글로써 신과 소통한다고. 그게 비유나 은유가 아니었다니.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조금 들뜬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든 질문에 대답을 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글로 써 내려가는 동안 답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 고민하고 계시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건 강아지가 주인을 향해 보이는 조건 없는 호의 같은 것이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에 고개가 멋대로 끄덕여졌다.

    “고마워요.”

    “지금 써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나는 근처의 책상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펜을 들었다. 테오도르는 보지 않겠다며 멀찍이 떨어졌다. 나쁘지 않은 경험인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펜을 잡았다.

    ‘뭘 쓰지?’

    그러나 막상 질문하려고 하니 뭘 써야 할지 막막했다. 진짜 대답을 해 주는 건 아니라지만, 한 장뿐인 종이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보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벨은 책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뚫어질 정도로 노려보았다.

    ‘백작과 원만하게 이혼할 방법을 물어볼까?’

    아니, 그건 필요 없었다. 백작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기는 하나 조금 더 밀어붙이면 조만간 이혼 서류에 사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자가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

    이것도 아니었다. 리자가 정신을 차리는 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기적이 일어나는 걸 바라는 게 빨랐다. 쯧, 습관처럼 혀를 찼다. 꿀 같은 금발과 보석 같은 눈동자를 떠올리자니 속이 갑갑해졌다.

    ‘다른 걸 물어보자.’

    테오도르에게 언제 내 마음을 전하면 좋을지 물어볼까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연애 상담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질문을 적어 넣었다.

    ‘내가 왜 카를라의 몸에 들어왔지?’

    왜 하필 나였는지, 카를라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것은 무수히 많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래 봤자 신이 대답해 줄 리는 없지만. 나는 킬킬 웃으며 종이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어?’

    순간 불빛이 흔들거리며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던 금색 잉크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건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카를라의 필체를 흉내 내어 쓴 글자가 반짝이더니, 이내 그 아래로 글자가 새겨지듯 나타났다. 한글이었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나의 모국어.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글자를 읽어내렸다.

    [원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원했는데? 글자는 잠시 흐려지더니 이내 뭉쳐졌다 퍼지며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냈다.

    [그녀가 원했기 때문에.]

    신을 정말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신의 말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참았던 숨을 뱉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내가 카를라의 몸에 들어온 게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다급하게 펜을 들어 그 밑에 다시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한글이었다. 대답해 주고 있는 게 신이라면 한글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집에 돌아갈 수 있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반쯤 포기하고 있던 욕심이 울컥 올라왔다. 눈앞에 떨어진 동아줄을 붙잡고 싶어졌다. 잠시 기다리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불가능]

    단번에 떠오른 글자에 욕을 뱉고 싶었다. 마음대로 데려와서는 집에 못 간다고 하면 이게 납치랑 다를 게 뭐야? 울컥하는 마음에 빠르게 휘갈겨 썼다.

    ‘어째서?’

    글자 또한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가 원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를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이곳으로 부른 건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무슨 뜻이지?’

    다시 물었으나 글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적혀 있던 글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글자를 주워 모으려고 했으나 종이 위에 뿌려진 잉크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종이는 언제 잉크가 묻었냐는 듯,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마구잡이로 질문을 갈겨 썼다. 한글로, 이 세계의 글자로, 그것도 모자라 내가 아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그러나 다시 글자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글자를 쓰고 또 써도 사라질 뿐이었다.

    ‘미친!’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찾았다. 그는 줄곧 나를 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곧바로 눈이 맞았다. 다급하게 종이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테오도르 또한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종이를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테오도르의 동공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종이를 받아들었다가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위대한 분께서 다녀가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원하시던 답은 찾으셨습니까?”

    답은커녕 오히려 궁금증만 늘었다. 받아드는 손에 힘이 풀렸다.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종이가 팔랑팔랑 책상 위로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