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5화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는 잠을 애써 털어 내는 것도 어려웠다.
“일어나셨어요?”
“응, 아침은 괜찮으니 차 먼저 타 줄래?”
“네, 마님.”
늦게 일어난 것만 뺀다면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벨이 타 온 차를 마시고 초대장을 정리했다. 마차를 탈 수 없는 탓에 편지로 카지노의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네, 마님.”
마지막 서류를 벨에게 넘겨주자, 그녀는 능숙하게 서류를 봉투에 넣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좁은 화장대에서 일한 탓에 어깨가 뻐근했다. 가볍게 훑어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몰입한 모양이었다. 어깨를 툭툭 치고 있으니 얼른 리자가 다가와 팔을 주물러 주었다. 나는 힐끔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얼굴에 자리 잡은 멍은 옅어지기는 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잊자.’
찝찝함의 원인을 알아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리자의 금발이 시야 끝에 걸릴 때마다 양심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님, 아프세요?”
인상을 찡그리자 리자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혼을 내기라도 할까 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리자는 필요 이상으로 해맑고, 필요 이하로 눈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백작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화가 날 정도로 당당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괜찮으니까 머리나 좀 빗겨 줄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어 흐트러트렸다. 리자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님!”
리자는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빗어 내렸다. 평소에는 벨에게 시키는 일이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은 더디게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영 어설픈 솜씨는 아니었다.
거울 너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상 멍청하다고 구박만 했는데,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굼떠서 지루하구나.”
“빗질을 더 빨리할까요?”
“아니. 서두르다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내가 손을 내젓자 리자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야기나 좀 해 보렴.”
“이야기요?”
“뭐든 좋아.”
뭐든 좋다는 말보다 더 어려운 주문이 있을까. 평소 잘만 재잘거리던 리자가 끙,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떠올리는 것을 말하는 척, 이야기를 유도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네 이야기를 하면 되잖니. 남작의 저택에 고용되기 전에는 뭘 했니?”
방향을 잡아 주자 리자는 금방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작의 저택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수도 외곽에 살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 다른 형제는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해맑았다.
‘괜히 물어봤나?’
남의 집안 사정을 캐묻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거울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리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침 해가 뜰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일하는데도 두 사람 입에 풀칠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몸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그녀는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잔심부름을 해 돈을 벌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리자의 소란스러운 발소리는 그때부터 새겨진 습관인 모양이었다.
“밥벌이하는 건 어떻게든 되는데, 아픈 사람 수발은 정말 할 게 못 되더라고요.”
리자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약값이 얼마나 나갔는지까지 듣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힘들었겠네.”
간신히 뱉은 위로의 말은 볼품없었다. 거만하게 들리는 특유의 말투 때문에 위로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리자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맞아요!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아픈 사람이 힘은 얼마나 좋은지, 저택에 들어가기 전까지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니까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당황한 마음에 불쑥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아버지한테 맞았다는 거야?”
리자는 내가 왜 목소리를 높이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아버지는 술에 약해서, 취하면 아무나 때리고 싶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아, 저는 엄마 닮아서 잘 마셔요!”
제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 웃는 그녀가 낯설었다. 거울 너머로 벨이 비쳤다. 그녀 또한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듯,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리자의 비굴할 정도로 해맑은 성격의 원인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 * *
가라앉은 기분은 도통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랜 빗질로 매끈해진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기분으로 데이트를 하러 가도 될까.’
분명 찝찝한 기분을 없애려고 했는데 더 수렁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벨이 나를 불렀다.
“마님, 문을 열까요?”
퍼뜩 고개를 들자 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님이에요.”
벨이 귀띔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방문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오늘이 백작을 굶긴 사흘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벨이 문을 열자마자 인사 대신 질문을 받은 집사가 떨떠름하게 미소 지었다.
“마님, 말씀하신 사흘이 지났습니다. 백작님께 다시 식사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계속 끼니를 거르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백작을 중병 환자 취급하며 말했다. 맑은 수프부터 시작해 점차 음식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 의도가 투명하다 못해 훤히 들여다보여 웃음이 나왔다. 집사는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내 양심을 긁어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동안 백작이 뭘 먹었는지 내가 뻔히 아는데 거짓말을 하네.’
애초에 집사가 내 명령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집사가 음식을 빼돌릴 때마다 하녀들은 벨에게 달려갔고, 벨은 그들에게 들은 것을 고스란히 내게 보고했다. 백작은 목을 다쳐 빵이나 샐러드는 먹지 못해도 수프나 과일즙은 잘도 먹었다. 뻔뻔스럽게 금식을 들먹이는 그녀의 행동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알아서 챙기게.”
“네, 마님.”
손을 내저었지만, 집사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나 싶어 그녀를 바라보자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는 것이 보였다.
“백작님께서 마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집사를 훑어보았다. 얼마 전에는 마차에 수작을 부리더니 이번에는 식사에 장난질을 칠 생각일지도 모른다.
“거절한다고 전하게.”
“그러지 마시고 한 번 더 생각해 주시면…….”
“내가 자네에게 두 번 말해야겠나?”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집사가 방을 나서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백작만 생각하면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님, 차를 타 올까요?”
“아니, 그냥 찬물이 좋겠어.”
벨은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의자에 기대어 짜증스럽게 숨을 뱉자, 리자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머리를 다시 빗을까요?”
“아니.”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눈을 굴려 바라보니,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쟨 뭐가 좋다고 웃어.’
반사적으로 못된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나는 퉁명스럽게 뱉었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해.”
리자는 문을 힐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성기사님이 아까부터 계속 보고 계세요.”
나는 얼굴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벨이 제대로 닫지 않았는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테오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멋쩍게 웃는 것이 보였다.
아마 마차가 고쳐진 것 때문일 것이다. 휴일을 잡아야 했으니까. 나는 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리자, 주방에 가서 과일도 좀 가져오렴. 벨에겐 찬물 대신 차를 타 오라고 전하고.”
“네!”
리자는 경쾌하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까딱 목을 숙이고는 요란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멀찍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테오도르를 부를 수 있었다.
“테오도르 경, 들어오세요.”
“네.”
그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는데,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의 틈을 열어 둔 채로 내게 다가왔다.
“카를라 님, 마차가 완전히 고쳐졌다고 합니다.”
“오늘요?”
“네, 마부가 신이 나서 말해 주고 가더군요.”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니 방금까지 답답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라도 하듯 뻣뻣한 자세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성기사 테오도르, 익일 휴일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에 허가를 구합니다.”
뭘 하나 했더니 내게 휴일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퍽 진지해 보이는 얼굴에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네, 허락할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테오도르의 자세가 다소 편안하게 바뀌었다.
“내일, 카를라 님을 모시러 와도 되겠습니까?”
같은 저택에 살고 있는데도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데이트를 한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