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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4)화 (7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4화

고작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뿐인데 기분이 좋았다. 바닥이 아니라 구름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공기마저 달았다.

‘내가 이렇게 들뜨기 쉬운 사람이었나?’

나 자신을 의심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백작이 밥을 달라며 사용인을 들들 볶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누구든 백작의 식사를 도우면 매를 맞을 줄 알라고 엄포를 놓은 덕분인지 사용인들은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 그런 엄포가 없어도 백작이 깨트린 접시 값을 급료에서 제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섣불리 나설 리가 없었다. 리자가 제 몫의 빵을 남겨 백작에게 가져갔다가 뺨을 맞은 이후로 사용인들은 더욱 몸을 사렸다.

리자의 동그란 광대뼈에는 새파란 멍이 자리 잡고 있었고 꽃잎처럼 붉은 입술은 찢어져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백작에게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짙은 화장으로 상처를 가리기 위해 애썼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까 왜 백작한테 신경을 써서는.’

최대한 리자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얼굴에 난 상처는 그녀를 더욱 가련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틈만 나면 리자를 흉보던 하녀들이 자신도 모르게 안쓰럽게 여길 정도였다.

결국, 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리자의 얼굴에 대해 입을 열고 말았다.

“얼굴 꼴이 그게 뭐니.”

“얼굴이요?”

리자는 제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는 줄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멍든 얼굴을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작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제 딴에는 잘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흉하게 보이잖니. 볼 건 얼굴밖에 없는데, 꼴이 그래서야 쓸 곳도 없구나.”

혀를 차며 상처를 지적하자 리자의 뺨에 핏기가 가졌다.

“마님, 그러니까요, 이게요…….”

그녀는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일어나다가 문에 부딪혀 멍이 들었다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거짓말을 지적하는 대신 벨에게 연고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벨은 리자를 흘겨보고는 빠르게 연고를 가져왔다. 연고는 여전히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을 리자에게 던져 주었다. 리자는 공중에 붕 뜬 연고 통을 치마를 펼쳐 받아 내었다.

“맞으려면 안 보이는 데서 맞으라고 했지.”

“네?”

언젠가 했던 말을 똑같이 퉁명스럽게 뱉자, 리자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한 박자 뒤에야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켰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 마님, 알고 계셨어요?”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제가 맞은 것보다 내가 그 사실을 아는 게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이 저택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것 같니?”

리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할 말을 찾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마님. 용서해 주세요. 음식을 훔친 건 아니에요. 제 빵을 백작님께 드렸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무릎 한번 값싸다고 비웃으려다가 그녀의 허전한 귓불이 눈에 들어와 입을 다물었다. 사랑의 증거를 다 잃어버린 어린 여자가 손을 모으고 내 발치에서 빌고 있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었다.

“왜 그랬어?”

항상 궁금했다. 리자가 왜 백작에게 그렇게 맹목적인지. 이 세계에서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카를라도 리자도 목을 매고 있는지.

리자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만 깜박거렸다. 방금까지 잘못을 빌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표정에는 기만의 의도 따위는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이 다시 절 사랑해 주셨으면 해서요.”

그러나 리자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도서관이나 다름없는 신전에는 그 해답이 있을까, 나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생각했다. 리자를 벌할 생각은 없었다. 백작에게 맞은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한 벌이 되었을 테니.

리자는 일어나라는 명령이 완전히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헤헤 웃었다. 벨은 태도가 그게 뭐냐며 리자를 구박했지만, 얼굴의 반이 새파랗게 변한 그녀를 평소처럼 쥐어박지는 못했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리자를 보자니 한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무언가 놓친 것처럼 꺼림칙했다.

‘뭘까.’

찝찝한 기분으로 테오도르와 데이트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마차가 다 고쳐지는 날을 휴일로 잡겠다고 말했다. 남은 시간 동안 해답을 찾아야 했다.

하루를 꼬박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이 찝찝한 기분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른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방에 틀어박혔다.

‘내가 뭘 놓치고 있을까.’

한없이 방 안을 빙빙 돌다가 문득 갑갑해져 창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괜히 열었다고 투덜거림과 동시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이나 리자인 줄 알고 대답하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를라 님,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테오도르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가로 다가가 대답했다.

“아뇨. 아무 문제 없어요. 왜 그러세요?”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쭈어보았습니다.”

그가 말하고 나서야 지금이 아주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달은 지붕 위에 걸릴 정도로 높이 떠 있었다. 평소라면 잠이 들었을 시간에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 놀랄 만도 했다.

“이런, 미안해요. 늦은 시간이라는 걸 깜빡했네요.”

“……고민이 있으십니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깜짝 놀라 되묻자 문 너머에서 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종일 카를라 님께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셔서 넘겨짚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았나. 항상 뒤에 있던 테오도르가 눈치챌 정도니 저택에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에 기대어 앉았다.

이깟 기분이 뭐라고 그렇게 골머리를 썩인담. 차가운 문에 어깨가 닿자 다소 냉소적인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나 봐요.”

평소처럼 괜찮냐고 물을 줄 알았던 테오도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기도 합니다.”

그는 내게 속의 이야기를 털어 내 보라 종용하고 있었다.

“테오도르 경이 그 상대가 되어 주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듣겠습니다.”

깊은 밤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사실 누구에게라도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나는 깊게 숨을 뱉었다. 테오도르라면 비밀을 지켜 줄 것이다. 입이 무거우니 누군가에게 말을 전할 리도 없겠지. 판단을 내리자마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아무렇게나 지껄여 대었다. 리자가 내게 사랑을 운운했던 일, 내가 그녀의 귀걸이를 빼앗고 창피를 주었던 일, 매를 때렸던 일과 백작이 리자를 때리려던 것을 말렸던 일……. 이름을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테오도르는 내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떤 일들은 그가 모르는 것이었고, 어떤 일들은 이미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게 뭘까요?”

문 너머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누군가에게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은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날까 싶어 몸을 움직이자,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나지막하게 울렸다.

“카를라 님께서는 그분을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고개를 저었다. 리자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이 갑갑한 것은 아니었다.

“안쓰럽긴 하지만, 그게 이렇게 신경 쓰일 일은 아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가 단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분을 돕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없어 갑갑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카를라 님은 다정하시니까요.”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다정하다니, 그만큼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고민하고 계시는데도 말입니까? 제가 듣기엔 카를라 님은 그분을 무척 걱정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당장 문을 열고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맙소사.’

그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었다.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 다 있담?’

충격으로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리자가 맞지 않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싫은 것과는 별개로, 백작 같은 쓰레기와 어울리지 않기를 바랐다.

‘정이 들어서 그런가?’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욕을 던졌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이제 좀 살 만해지려고 하니 싫어하던 사람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생겼나 싶었다. 그러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리자를 계속 맞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이놈의 오지랖.’

나는 깊게 한숨을 뱉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마워요. 이제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테오도르가 무어라고 인사했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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