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0화
자택 근신이라고는 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 자유롭게 밖을 나다닐 수 있었다. 백작은 자신과 어울려 다니던 귀족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집사는 근신 중 밖을 나가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그를 말렸으나, 완고한 백작의 고집에는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초대장도 없이 저택에 방문한 백작을 만나 주는 귀족은 없었다. 무엇보다 백작과 어울리던 자들은 오랜만에 열린 카지노에 푹 빠져 있어 그를 상대해 줄 겨를이 없었다. 자택 근신 중인 백작은 당당하게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어 매일 밤 허탕을 치고 돌아와 집사에게 화풀이만 했다.
‘집사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도와줄 의리는 없어.’
백작의 정신은 기본적인 판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려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체면도 내려놓고 아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간혹 시가를 구하면 방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보이지 않다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나와 다시 아편을 구걸하러 다녔다.
그럴 때마다 이혼 합의서는 점점 두꺼워졌다. 저런 구질구질한 사람과 계속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한 손으로 쥘 수 없을 만큼 종이 뭉치가 모이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카루스 백작에게 이혼장을 던졌다.
간만에 방에서 나온 백작은 식탁 위에 던져진 이혼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이혼 합의서예요.”
그는 카를라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 낡고 초라해져 있었다. 나는 식탁의 반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백작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쇠약해진 몸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이내 의자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요?”
“법원으로 가면 피차 번거로워질 테니, 원만하게 헤어지죠. 위자료는 필요 없어요. 짐을 싸서 나가 주기만 하면 돼요.”
“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웃으며 그의 속을 긁었다. 승기를 잡아 마음이 느긋하니 목소리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근신 기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떨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였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당신에게 창피를 줘서 이러는 거지?”
그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백작은 내가 이혼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조금도 모르는 주제에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었다.
“그래, 좋아. 당신이 어느 놈과 놀아나든 더는 신경 쓰지 않겠어. 대신 내 저택은 돌려줘야 할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이카루스의 머릿속이 손에 잡힐 듯 훤히 읽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돈을 잃어버린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어떤 사고를 거쳐야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나는 그를 짜증스럽게 보며 말했다. 툭 뱉어진 반말에 백작이 인상을 썼다. 제정신이 아닌 남자에게 계속 존댓말을 써 줄 필요는 없었다.
“당신 헛소리 계속 들어 줄 생각 없어. 합의하든가, 아니면 법정에서 보든가. 둘 중 하나야.”
그는 이를 악물더니 이혼장을 집어 박박 찢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이 바닥이며 식탁 위로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이혼은 절대 못 해! 두고 봐!”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백작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지.”
* * *
‘두고 보라고 했던 게 이거였을까?’
나는 뒤집힌 마차의 천장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괜히 남 탓을 하게 되었다. 카지노로 향하던 중 마차가 넘어진 것은 불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런 세상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교통사고도 겪어 보고.’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 보다가, 곧 누군가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마차가 쓰러지는 그 짧은 순간 테오도르가 나를 감싼 것이다.
“카를라 님! 괜찮으십니까?”
그는 내가 충격으로 말을 잃은 줄 알았는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멍한 정신을 붙잡고 간신히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테오도르 경은 괜찮으신가요? 다치지 않았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카를라 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테오도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듬직한 모습에 심장이 멋대로 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몸을 움직이는 듯하더니, 내 허리를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건 그와 가장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분명 무서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마차가 뒤집혔는데 테오도르가 옆에 있다는 것 하나로 이렇게 침착해질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네, 물론이에요.”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닿으면 전기가 통한 듯 목덜미가 저렸다. 등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분명 안심이 되어야 할 텐데 긴장으로 온몸이 바짝 굳었다.
테오도르는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놀랄 틈도 없이 시야가 바뀌었다. 그는 마차 창문틀 위에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주었다.
“움직이시면 창문이 깨져 다치실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내게 충고한 후, 능숙하게 의자를 타고 기어 올라가 문을 열었다. 나는 멍하니 테오도르의 흰 제복을 바라보았다. 그는 훌쩍 문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상체를 마차 안으로 넣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카를라 님, 손을.”
의자 가장자리를 밟고 올라서 손을 잡자, 그가 반대편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끌어올렸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성인 여성을 끌어 올리는 것은 퍽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테오도르는 조금도 힘든 내색이 없었다.
‘얼마나 힘이 좋은 거야?’
다행히 마차는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마부가 울먹이며 나를 불렀다.
“마님!”
다행히 마부는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렸다.
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지금 카지노로 돌아간다고 해도 도중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테오도르가 아래로 뛰어 내려가 마부와 함께 마차 주변을 살폈다.
“바퀴를 지탱하던 축이 부러졌습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벨을 데려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쌀쌀해지는 공기에 팔뚝을 문지르며 물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버틸 수 있을까요?”
테오도르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버티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차를요?”
마차를 고친다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테오도르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라.”
그는 나를 마차 위에서 내려 주고는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위험하니 잠시 떨어져 계십시오.”
테오도르와 마부는 나를 멀찍이 물러서게 한 후, 쓰러진 마차를 밀어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차는 몇 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마부와 테오도르는 바퀴를 붙잡고 이리저리 마차 본체에 끼워 넣더니, 이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듯 나를 불렀다.
“마님, 이거 큰일이 났는데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테오도르가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바퀴와 몸체를 연결하는 축이었다.
“이 부분이 부러져서 바퀴가 빠진 겁니다. 여기, 톱질해 놓은 흔적이 보이실 겁니다.”
그가 말한 대로 두꺼운 목재의 절반이 반듯하게 썰려 있었다. 대각선으로 엉성하게 썰려 있기는 했지만, 분명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이었다. 마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며 펄쩍 뛰었다. 어젯밤까지는 마차에 흠집 하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를 노린 짓이 분명해.’
그러나 지금 당장 범인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마차를 고쳐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네를 의심하지는 않아. 얼른 마차부터 고치게. 카지노는 다음에 방문해야겠군.”
내가 명령하자 마부는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테오도르는 근처의 나뭇가지를 꺾어 부러진 목재에 대고 허리띠로 그것들을 묶기 시작했다. 목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능숙한 솜씨였다.
두 사람은 마차 바퀴를 이리저리 끼워 넣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마부가 땀을 닦으며 보고했다.
“마님,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테오도르가 슬며시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테오도르 경이 없었으면 얼마나 곤란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네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테오도르는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좀 더 추켜세우기로 했다.
“정말 멋있었어요.”
내가 몇 번 더 칭찬하자 그는 새빨갛게 변한 목덜미를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 역력한 얼굴이 귀엽게 느껴졌다.
“큼, 임시방편으로 막아 둔 것이니 얼른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마차 위로 오르자, 방금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소년처럼 앳되어 보였던 얼굴이 이제는 듬직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자꾸만 눈에 그를 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