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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6)화 (6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6화

    나는 미셸 남작의 손을 잡고 피데스와 테오도르의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연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셸 남작은 지친 얼굴로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는데, 덕분에 나 또한 느긋하게 춤을 출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피데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십니까?”

    “아뇨. 조금 더 가까이 갈까요?”

    우리는 춤을 추는 척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피데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발음이 좋아 귀에 쏙쏙 박혔다.

    “그 말을 들으니 경이 점점 좋아지려고 합니다.”

    미셸 남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남의 동생을 왜 노려보냐는 괘씸한 마음이 들어 그의 발을 가볍게 밟았다.

    “윽.”

    “어머, 실수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둘의 대화가 신경 쓰였다.

    ‘갑자기 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훔쳐 듣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둘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춤을 추면서 가끔 먼 곳에 시선을 두었는데, 단번에 나를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셸 남작도 피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가, 몸을 크게 틀어야 할 때만 시선을 바로 했다.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둘이 잘 되면 좋겠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묻고 싶은 건 있었다.

    “남작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편히 물어보셔도 됩니다.”

    말하는 투가 피데스를 닮아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소공작님의 어디가 좋으신가요?”

    남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제야 피데스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무뚝뚝하게 뱉는 말은 이전과 달리 퍽 나긋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좋아하고 있어서요.”

    춤을 추는 도중이 아니었다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굴렀을 만큼 로맨틱한 말이었다. 내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자, 미셸 남작이 인상을 썼다.

    “바보 같나요?”

    “아뇨. 큽, 예상하지 못한 귀여운 대답이라.”

    나는 오지랖을 한 번 부리기로 했다.

    “소공작님은 아마 같이 쉬자는 말을 듣고 싶으셨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랑 춤추라는 말 대신이요.”

    “하지만 계속 춤을 추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그건 같이 춤을 추고 있을 때 들은 말인가요?”

    “네.”

    세상에. 피데스와 미셸 남작의 말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는 그에게 작은 충고를 건넸다.

    “정말…… 그건 계속 함께 춤추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요.”

    연애에 대해 누구에게 충고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들만큼 답답하게 굴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더 권유해 주세요.”

    “거절하실 게 뻔한데도 말입니까?”

    “아마 거절하지 않으실걸요?”

    미셸 남작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음악이 끝나는 것에 맞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즐거웠어요.”

    “즐거웠습니다.”

    미셸 남작은 나와 떨어지자마자 성큼성큼 피데스에게 다가갔다. 뻣뻣한 모양새였으나, 피데스를 좋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니 귀엽게 느껴졌다.

    “소공작님, 큼, 저는 이제 쉴 생각인데, 같이…… 와인이라도 한잔 어떠십니까.”

    “글쎄요. 피곤하신 분을 붙잡아 둘 수는 없죠.”

    얼핏 들으면 꼬드기는 남자와 거절하는 여자의 대화처럼 들렸지만, 피데스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미셸 남작이 다시 강하게 밀어붙였다.

    “……소공작님과 같이 있고 싶어서 청하는 겁니다.”

    마침내 피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는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근처에 있는 나를 찾아내어 곁으로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카를라 님.”

    “아주 멋있으셨어요.”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 정말 멋있었다. 테오도르의 동작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정석적인 춤의 교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춤을 출 때는 몰랐는데, 댄스 플로어에는 사람들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귀족들이 벽 가장자리나 술을 마시는 곳에 몰려 있어 중앙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테오도르는 주변을 둘러보다 우아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의식한 탓이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내려놓았다. 피데스도 테오도르와 춤을 췄으니, 내가 그와 춤을 춘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망설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부탁드려요.”

    속에 나비가 들어앉은 듯 심장이 요동쳤다. 우리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자세를 잡았다. 나는 차마 그를 보지 못하고 가슴팍만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카를라 님과 첫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부끄러운 듯 웃고 있었다.

    ‘아. 그래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오라는 제안을 거절한 거구나.’

    부드럽게 휘어진 눈에 다정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카를라 님과 함께 할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나는 홀린 듯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발이 가벼웠다. 우주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이 넓은 홀에 단둘만 존재하는 기분. 그의 새파란 눈에 오롯이 나만 담겨 있다는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 머리를 관통했다. 테오도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까 피데스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테오도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아, 하고 짧은 감탄을 뱉었다. 그는 처음으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궁금하십니까?”

    “조금요.”

    무슨 말을 했길래 그렇게 재미있게 웃었는지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왜 웃기만 하세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테오도르가 쩔쩔매며 변명했다.

    “감히 놀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도 카를라 님이 미셸 남작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여쭈어보려고 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는 간식을 훔쳐 먹다 걸린 아이처럼 줄줄 변명을 읊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부끄럽습니다.”

    나는 웃음을 거두려고 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애에 대한 충고를 좀 해 줬어요. 미셸 남작이 워낙 답답하게 굴길래.”

    “아…….”

    테오도르가 다시 짧은 감탄을 뱉었다.

    “저도 소공작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이 확실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은 자물쇠라도 달린 듯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귓가엔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아앗!”

    철퍼덕, 하고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음악이 끊기고, 그 자리를 웅성거림이 메웠다. 나도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테오도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지금 내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테오도르의 어깨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내게 날아들었다. 테오도르는 몸을 돌려 그것을 막아 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으, 으윽…… 뭐 하는 짓…….”

    테오도르가 이카루스 백작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제압했다.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우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백작은 테오도르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버둥거리면서도 최대한 목을 뒤틀어 나를 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닌 척 굴더니, 딱 걸렸군! 역시 내 눈은 못 속여!”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뱉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을 보아 하니 어디선가 아편을 피우고 온 것 같았다.

    “내 돈을 저놈에게 줄 생각이지!”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게 무슨 일이죠?”

    “백작이 갑자기 남작 부인을 밀치더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하지 않겠소?”

    나는 한숨을 쉬며 테오도르에게 백작을 옮겨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백작은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런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사달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찬물을 뒤집어씌우든 때리든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단번에 소란을 잠재웠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인파가 반으로 갈라져 넓은 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왕이 걸어 나왔다. 장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백작의 욕설만이 소음처럼 퍼져 나갔다. 왕의 표정에 경멸이 섞였다. 등 뒤가 차갑게 식었다.

    ‘이거 큰일 났는데.’

    단순한 파티였으면 백작이 술에 취한 것이라고 쉬쉬하고 덮을 수 있겠으나, 이 파티는 왕의 생일 연회였다. 아무리 그가 독단적으로 아편을 섭취했다 한들 파트너이자 부인으로서 나 또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보지 못할 때 얼른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보아 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이 더욱 조용해지자, 백작은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테오도르가 백작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다시 묻겠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내가 설명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이 난장판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백작이 꽥 소리를 질렀다.

    “폐하! 순결해야 할 성기사가 제 부인을 꼬드겨 재산을 빼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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