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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5)화 (6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5화

입구 근처에서부터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도미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에 맞춰 나도 따라 허리를 굽혔다. 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를 위한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들게.”

그제야 모든 사람이 허리를 들어 올려 왕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왕의 얼굴은 앳돼 보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펜촉처럼 보이는 티아라가 올려져 있었고, 치맛단에는 까만 실로 글자처럼 보이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한 차림에 주변을 둘러보니, 신전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이 저편에 보였다.

‘와, 생일 파티를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쓸 수 있구나.’

신전과 손을 잡아 왕위에 올랐다고 하더니, 신을 따르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옷차림이었다.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왕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해 주어 고맙소. 오늘은 마음껏 즐기시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인사였다. 이런 자리에서 몇 시간 내내 뜻 모를 말을 떠드는 게 높으신 분들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아닌 모양이다. 왕이 말을 마치자마자 새카만 제복을 입은 기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다.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졌다.

그와 동시에 악단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고, 왕과 기사는 능숙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아하다는 말은 그녀를 위한 것 같았다. 짧은 곡이 끝나고 왕과 기사가 인사하자, 주변 귀족들이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가지.”

백작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강한 악력은 아니었으나 기분이 나빠 차갑게 손을 뿌리쳤다. 백작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파요.”

“엄살은.”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댄스 플로어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나는 백작과 최대한 닿지 않으려 애썼다. 땀으로 끈적한 손을 잡는 것조차 불쾌했다.

“당신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요?”

내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자 백작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숨에 섞여 나오는 악취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를 밀어내기 직전, 새로운 곡이 시작되었다. 백작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나는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다가 구두로 백작의 발을 밟았다.

“윽!”

“어머, 죄송해요.”

백작은 몸을 움찔거렸으나 아픈 걸 티 내지 않고 계속 발을 움직였다.

“똑바로 하시오.”

“제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만. 아차, 또 실수.”

나는 한 곡을 추는 내내 실컷 백작의 발을 밟았다. 어떻게 춤을 췄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그의 다리를 찼다. 상대의 춤 솜씨가 얼마나 엉망이든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게 귀족의 미덕이라, 백작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 내려고 했다.

그는 곡이 끝나자마자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나 또한 불쾌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백작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이만 할 일이 있어서 계속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군.”

백작은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대었다. 묻지 않아도 아틀라스를 찾는 게 뻔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떴다. 휘청거리는 뒷모습을 보니 고소했다.

‘몇 번 더 밟아 줄 걸 그랬나…… 조금 아쉽네.’

격한 춤은 아니었지만, 백작의 발을 밟기 위해 열심히 다리를 놀렸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갑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부채질하고 있자니,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늦었습니다. ……카를라 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얼굴이 보였다.

“아, 테오도르 경.”

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해서, 이런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만 있다면 백작과 한 번 더 춤을 추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춤을 격하게 춰서 그래요.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평소라면 괜찮다며 사양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의 제안이 정말 반가웠다.

“고마워요.”

테오도르는 쏜살같이 음료대로 향했다. 잠시 뒤, 기포가 톡톡 터지는 샴페인 잔을 내밀며 그가 머쓱하게 말했다.

“일반 음료는 아예 준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장 도수가 낮은 술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드시기 힘드시다면 사용인들에게 물이라도…….”

나는 잔을 받아 들며 웃었다. 고작 술 한 잔에 그가 쩔쩔매는 것이 귀여웠다.

“괜찮아요. 샴페인 정도는.”

잔을 입에 대고 맛을 보니, 탄산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마저 잔을 비우고 지나가는 사용인을 불러 잔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기운이 나네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연회장 내부를 돌았다.

“백작 부인, 한 곡 추시겠습니까?”

“좋아요.”

춤을 권유하는 사람의 손을 잡거나 거절하는 동안 테오도르는 내가 돌아갈 위치가 되어 주었다. 나는 다른 남자와 춤을 추면서도 곁눈질로는 테오도르를 힐끔거렸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떨어트린 적이 없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다른 사람과 춤을 추러 가도 괜찮다고 말했으나, 테오도르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그를 설득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친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본은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춤을 추고 있었고, 왕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장식만 간신히 보였다. 후작 부부와 마리가 얼핏 보이기는 했으나, 너무 멀어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피데스를 못 봤네.’

카지노 안을 좀 더 훑어보자, 구석진 곳에서 미셸 남작과 티격태격하고 있는 피데스 소공작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대화가 조금씩 들렸는데, 분위기가 매우 살벌했다. 그들의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제가 다른 분과 춤을 추는 걸 보고 싶으시다고 하신 건 남작님 아니십니까? 실컷 추고 올 테니 남작님께서는 푹 쉬고 계시죠.”

“그런 뜻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리는지 모르겠군요.”

둘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싸우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채 펴는 소리를 냈다.

“두 분이 보이지 않아 걱정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피데스였다.

“언니! 오늘따라 아름다우시네요!”

그녀는 언제 인상을 쓰고 있었냐는 듯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피데스는 이전에 입은 것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나, 그때보다 훨씬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백작 부인.”

미셸 남작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는데, 방금까지 피데스와 말다툼 하는 모습을 본 후라 그런지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고 계셨나요?”

내 물음에 미셸 남작이 아, 하고 곤란한 신음을 뱉었다. 피데스가 고자질하듯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

“미셸 남작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지, 저한테 다른 파트너를 찾아보라고 하셔서요.”

“조금 쉬겠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갔다. 체력이 좋지 않은 미셸 남작이 피데스에게 자기가 쉬는 동안 다른 사람과 춤을 추라고 했고, 피데스는 그러고 싶지 않아 말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미셸 남작을 흘겨보았다.

‘얼마나 말을 밉게 했으면 피데스가 저런담.’

피데스는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어깃장을 놓았으면 그녀가 저렇게 꼬인 소리를 할까. 나는 속으로 그를 흉보면서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소공작님께 파트너가 필요하시다면…… 테오도르 경,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고개를 기울여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자, 그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일 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탁해요. 한 번만요.”

테오도르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데스를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소공작님, 한 곡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피데스가 손을 올리지 않자, 미셸 남작이 그녀를 부추겼다.

“다녀오십시오, 소공작님.”

“남작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피데스는 미셸 남작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가시죠.”

테오도르는 능숙하게 피데스를 에스코트했다. 둘의 분위기가 참 좋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거리가 멀어 입 모양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시선을 돌려 옆을 보자 미셸 남작이 테오도르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건 명백한 질투의 눈빛이었다.

나는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신경 쓰이시나요?”

“네.”

미셸 남작은 태연한 척 답했다가 자신의 대답에 놀라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부정하는 모습이 어린 소년 같아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다.

“그렇게 신경 쓰실 거면 왜 다른 사람이랑 춤추라고 권유하고 그러셨어요.”

“소공작님께서 춤을 추고 싶어 하시니…… 그리고 저는 그렇게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신가요?”

“예. 오히려 제가 보기엔 백작 부인께서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요.”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언니들은 늘 동생을 걱정한답니다.”

미셸 남작은 주변을 훑어보는 척, 피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피데스가 테오도르를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미셸 남작은 차마 그들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놀릴 심산으로 물었다.

“정말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절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요.”

미셸 남작은 작게 심호흡을 하곤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소공작님께서 다른 남자를 보고 웃으실 때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갑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저렇게 즐거워하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저랑 한 곡 어떠십니까.”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는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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