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4화
백작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확장되는 게 보였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역력한 얼굴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 저택을 제게 양도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릴!”
순식간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더니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고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낮고 음침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택은, 안 돼. 이곳의 주인은 나야. 여기는 내 집이야. 남들이 알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백작의 목이 기괴하게 좌우로 흔들거렸다.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제가 가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웃고 있는지, 얼굴이 굳어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백작이 제정신이 아닐 때 얼른 밀어붙이자는 생각뿐이었다.
“최소한 흠이 잡히지 않게 하자는 거죠.”
“…….”
“부인의 돈으로 투자금을 돌려줬다고 하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백작의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 표면상으로는 제가 저택을 인수하고, 그 돈으로 투자금을 돌려준 것처럼 해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거요?”
“그럼요.”
백작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목걸이 상자를 당장이라도 던질 것처럼 움켜쥐었다.
“감히, 내 앞에서 저택을 들먹이며 건방진 소리를 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달라질 건 없어요. 백작님께서는 지금처럼 저택을 관리해 주시면 돼요.”
백작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걸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일 뿐. 나는 그가 넘어올 수밖에 없을 제안을 던졌다.
“저택의 값은 전부 현금으로 치를게요.”
가지고 있는 돈을 긁어모으면 저택의 값은 충분히 치를 수 있었다. 백작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인 조건일 것이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작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뭣하면 지금 바로 서류를 작성해 증거를 남기셔도 좋아요.”
“하! 자신만만하군? 그래, 좋아. 그렇게 해.”
백작이 하녀들에게 소리쳤다. 도통 음식을 먹지 못해 마른 그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집사, 집사를 불러와!”
멍하니 있던 리자가 집사를 불러오기 위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백작은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는 내게 목걸이가 든 상자를 마저 내밀었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누가 쓰던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상자를 던지려다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품에 쑤셔 넣었다.
‘어디에다가 팔아 치울 생각인가 보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이어 집사와 리자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집사는 안색이 희게 질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백작은 집사를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집문서와 인장을 가져오고, 매매 계약서를 쓸 테니, 준비하도록.”
“백작님! 그게 무슨…… 갑자기 집문서라뇨?”
“잔말 말고 얼른!”
백작은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녀가 찻잔을 채우기 무섭게 차를 마셔 대는 모습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찻물이 적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연거푸 찻잔을 비웠다.
결국 백작은 집사가 돌아오기까지 찻주전자를 몽땅 비웠다. 집사가 집문서를 들고 오자 백작은 물이 흥건한 테이블에 그것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계약금으로 10%를 먼저 줘야겠소. 아, 당신은 이런 걸 잘 모르겠군?”
계약금이라는 건 말이야, 하고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저택을 구매하는 것을 도중에 취소해도 그동안 내가 낸 돈을 자신이 가지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계약금을 받고 내게 야금야금 돈을 뜯어내다가 저택을 양도받지 못하게 수를 쓰거나, 어떻게든 말을 바꿀 생각인 듯했다.
그는 집사에게 문서를 빼앗듯 받아들고 두꺼운 종이 아래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더니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백작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집문서를 훑어보았다. 저택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으나, 못 낼 정도로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다. 나는 혀를 차곤 벨에게 명령했다.
“벨, 보관하고 있는 현금을 다 가져오렴.”
“네, 마님.”
백작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눈만 깜빡였다. 나는 손깍지를 끼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았다.
“계약금이니 뭐니 따지는 거, 귀찮지 않나요? 그냥 한 번에 해결하죠.”
벨은 몇 번에 나눠 돈을 옮겼다. 식탁 한쪽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보는 집사의 눈이 번득이는 것이 느껴졌다.
백작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이를 갈며 말했다.
“고작 사인 하나 했다고 모든 걸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여전히 이 저택의 주인은 나라는 걸 당신은 똑똑히 알아야 할 거요. 내 집에 다른 사내를 끌어들일 생각은 마.”
뜬금없는 말에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저택을 넘기겠다는 서명을 하고서도, 카를라의 재산이 제 것인 양 구는 행태는 도무지 참아 주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자꾸만 테오도르를 걸고넘어지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눈은 못 속여.”
남의 침대 위에서 불륜 행각을 벌이고도 뻔뻔하게 굴던 백작의 태도가 떠올라 화가 울컥 올라왔다.
“적어도 누구처럼 남의 침대에서 뒹굴다 걸리지는 않겠죠.”
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백작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날 마주 보았다.
“당신, 최근에 여기저기 쏘다니더니 이상한 물이 든 것 같군.”
“아뇨.”
뺨이 홀쭉해진 남자는 이전보다 더 우습고 하찮아 보였다. 당장이라도 몸싸움을 벌여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나는 집문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테오도르가 즉답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이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했다. 등을 돌려 식당을 나가는 동안 백작은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 * *
백작은 한동안 방 밖을 나오지 않았다. 벨의 말로는 매일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어찌나 학습 능력이 없는지, 다시 투자자를 구해야 할 판에 저런 꼴이라니. 어쨌든 얼굴을 보지 않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아 편했다. 나는 한동안 마음껏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런 생활은 연회 전날까지 이어졌다. 벨이 분주하게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당일까지도 침대에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마님, 차에 치즈를 타서 마셔야 피부가 반들반들하게 변한다니까요.”
벨은 여전히 차에 치즈를 타겠다고 우겼지만, 나를 치장하는 데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예정대로 짙은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흰 숄을 걸쳤다. 거기에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뒤 진주 핀으로 장식하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결 우아해 보였다.
“마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벨이 머리에서 손을 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날이 갈수록 아부하는 솜씨가 느는구나.”
밝게 미소 짓는 그녀가 밉지 않아 피식 웃자 벨이 내 머리를 마저 정돈했다. 화장으로 사나운 눈매를 최대한 감추고, 입술은 연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평소보다 순해 보였으나, 아무리 애써도 차가운 분위기는 바꿀 수가 없었다.
방을 나서자마자 테오도르와 눈을 마주쳤다. 흰 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는 동화 속 왕자 같아 보였다. 문득 눈을 비비려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몇 시간 동안 한 화장인데, 망칠 수는 없지.’
눈에 힘을 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백작은 여전히 퀭한 얼굴을 하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묘하게 소름 끼치는 눈빛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추자 테오도르가 내 팔을 잡아 주었다. 나는 그에 기대어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고마워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백작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시죠.”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린 거요? 오랜만의 파티라 들뜬 모양이지?”
옆에 다가가기가 무섭게 그가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으려 입을 꾹 닫았으나, 백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당신이 아무리 화장을 진하게 해도 본판은 달라지지 않아. 그 숄은 뭐지? 천박해 보이잖아.”
저 얄미운 입을 꼬챙이로 꿰어 버릴 수만 있다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왕의 생일만 아니었으면 당장 머리채를 잡았을 것이다.
“폐하께서 선물해 주신 숄이에요.”
“쯧…….”
백작은 왕의 선물을 헐뜯을 용기는 없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먼저 마차로 향했다. 이런 인간과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카지노는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화려한 외부는 여전했으나 내부는 무서울 정도로 단정하게 단장해 놓았다. 반듯하게 변한 카지노를 보니 왕의 생일 연회라는 실감이 났다.
게임장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에게 초대장을 내밀자, 그들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설에서나 봤던 그 말을 뱉었다.
“이카루스 백작, 백작 부인 입장하십니다!”
무도회라 그런지, 문을 열자 빠바밤, 하는 나팔 소리도 들렸다.
‘직접 들으니까 진짜 부끄럽다.’
나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내부는 다른 무도회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가장 깊은 안쪽 부분에 단을 만들어 화려하게 꾸민 것이 눈에 띄었다.
“카를라!”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본 남작이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이전에 나에게 말해 준 것처럼 갈색에 가까운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붉은 머리카락과 매우 잘 어울렸다.
“이본, 잘 지냈어요?”
“그럼요. 카를라, 오늘따라 더 예쁘네요!”
“이본의 드레스도 정말 멋져요. 목걸이는 새로 맞춘 건가요?”
“맞아요! 카를라는 정말 눈썰미가 좋네요.”
우리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카루스 백작과 아틀라스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틀라스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려 대었는데, 백작과 나란히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는 꼴이 우스웠다.
주변을 훑어보니 그리 덥지도 않은데 손수건을 꺼낸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부분 백작처럼 여위어 있어 휘청거리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입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에 따라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